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 길은 거의 10km쯤은 됐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에 매일 20km를 걸었던 것이다.
자동차(버스)는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걸어다녀었고, 고등학교 때 쯤에는 벌말까지 오는 버스가 생겨 이따금씩 버스를 탔으나 버스를 탄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언감생심이었었다.
이 길을 자전거로 통학하는 애들도 제법 있었지만, 나는 부모님의 철학으로 문명의 이기는 못 누렸었다. 경제적으로는 사 주실 만했으나 여차하면 넘어져
다칠세라 염려하심으로 사 주시지도 않았었고, 나도 사 달라고 졸은 적이 없었었다. 진취적이지 못한 내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낭댕이를 둘을 지났었고 물 건너기는 셋으로, 금강을 한 번 배로, 현내천과 봉황천은 다리와 징검다리로 혹은 바짓가랑이를 걷고 건넜었다.
대개 시간은 1시간 반 남짓 걸렸었다.
60년대 나의 학교 길.
먼저 생각나는 지명이 뱃마티고개다.
우리 마을 이름이 여럿 있는데, 안담(안땀), 내맡(내맡에), 내장(內場) 등으로 지금도 불린다. 옛날 기록에는 천장리(川場里)로도 불렸다는 말도 들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이름 들어보지 못했다. 행정명은 신촌3리이고, 신촌리는 금강이 삼면을 휘감고 있는 마을로 네 동네가 있다. 원신촌(웃새터) 안땀 춘호(아랫새터) 목골(못골)이다. 두 새터마을은 강변에 연해 있고, 목골과 우리 내맡은 비교적 강과 떨어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서 강까지의 직선 거리는 100m가 안 될 것이다.
이 내맡마을 안땀은 삼면이 야트막한 산으로 싸여있고 서쪽면만 논밭으로 좀 트였다가 또 야트막한 산으로 가려 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안땀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학교에 가려면 마을 남쪽에의 재를 넘어야 한다. 마을 앞동산을 질러넘는 고개로 고개 날망에 올라서면 바로 금강이 내려보이고 강건너 넓은 평야가 저 멀리 미랭이마을과 경당리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재를 넘어 강가에 이르면 뱃마티다. 지금 명칭으로는 뱃나루터일 텐데, 여하튼 '밴마티'로 불렸다. 그 곳에 사공이 있었다. 그 사공 가족들이 배를 띄워 우리를 강 건너 대처로 운송했다고 해야겠지.
강 건너 강변길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자면 개천이 나오는데 현내천이다. 이 현내천은 지삼티께의 갈선산과 수로봉에서 발원하여 현내리를 거쳐 유문리께서,배젱이재와 덕기봉에서 발원하는 불이천과 합류하여 이 곳에서 금강물에 합수된다. 징검다리가 있었고, 물이 많은 여름철에는 바짓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건넜고 때로는 바지를 벗고 건너기도 했었다.
이어 나타나는 곳이 마디기양지다. 도파리의 물이 살미양지를 지나면서 금강은 곧게 서진하다가 도졸여울께서 가파르게 흐르다가 여기 강정모랭이에서 급右廻하여 솔밭(신촌松林遊園地)을 감싸며 동동북으로 흘러간다. 학교 길은 강과 반대로 서서북쪽으로 마디기양지를 거쳐 서낭당고개(성치지맥)를 향해 서서히 올라간다.
마디기양지는 서너 호의 마을인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묘지들이 대신 들어차 있다. 이름 붙여진 유래가 매우 궁금하다. 내 생각으로는 햇볕이 오래도록 비취는 곳이라는데서 붙여졌지 않나 하는데 잘은 모르겠다.
마디기양지부터 논이 많은 골짜기를 돌고돌아 서서히 오르면 약물내기께서 마지막으로 우로돌아 오르면 서낭댕이가 나타난다. 서낭당고개를 경계로 마을이 바뀐다. 지금까지는 강 건너면서 평촌리(벌말, 왜말, 수촌리-물페기,동기, 마디기양지)이고, 재를 넘으면서는 선원리(선원, 기물리-트무실)다.
서낭댕이를 스르르 내려가면 지금의 601번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 신작로는 부리면 소재지에서 경당리와 선원마을과 선원재를 거쳐 내려오는 길로
자동차도 지나다닌다.
이 삼거리에서 右廻하여 좀 북진하면 트무실(틀무실, 機勿里)마을이 나타난다. 선원재 등에서 발원하는 선원천이 기물리재 등에서 시원을
둔 물이 트무실 앞에서 합류하여 제법 큰 하천을 이루고, 김성리재에서 발원하는 물도 이 곳에서 합쳐지며 교량도 하나 서 있다.
이 마을에 김성리재에서 내려오는 길과 합류하는 삼거리 오른쪽에는 주막집 같은 한 외딴집이 있었었다.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가자면 선원천을 건너야 하고 이 천을 따라 가다가면 중바우모텡이이 오르막이다. 여기서 선원천은 601번 지방도와 멀어지면서 창평리 흰바우로 향하여 우로 북진하여 봉황천에 합류할 것이다.
중바우모텡이를 돌아 야트막하게 내려서면 창평국민학교 울타리가 왼쪽으로 길과 나란하다. 여기서부터 금산의 곡창(穀倉)인 창들이다. 창들을 행정명으로는 창평리(倉坪里)라고 하는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창평들은 봉황천을 건너 금산읍까지 뻗어 있고, 봉황천 하류로는 제원들과 개티벌이 대산리 앞까지 펼쳐진다.
창들마을의 창평천을 건너서 벌판을 가로지르고 벗어나면 창평제방이 나타난다. 이 둑은 근 2km쯤 된다. 이 창평뚝은 둑 넘어 북쪽에 있는 봉황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선 중기 이후에 축조됐으라고 추측을 하는가 본다.
이 제방에서는 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양각산을 아는 친구들은 나의 걸음걸이의 특성을 알 것이다. 뒤로 제치고 팔을 이상하게 흔드는 특성은 유명했다. 이 제방 끝에서 저쪽 끝에 가는 나를 걸음걸이로 알았다 했으니.... 그놈의 발걸음 폼은 지금까지도 못 고치고 있으니 ㅎㅎㅎㅎ.
제방은 봉황천을 거슬러오르면서 왼쪽 천변에 쌓은 것으로 뚝 끝 지점에 봉황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사담다리라 했다. 사담은 봉황천
건너 마을로 제원면 수당리의 한 마을이다.
이 다리는 섶다리일 때도 있고, 징검다리 형태일 때도 있다. 여름철이면 아예 없기도하다. 장마 때 떠내려가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다리(봉황천)를 건너면서 제원면 땅이다.
바로 이 지점이 금산천 물이 봉황천에 합류지이고, 왼쪽으로는 금산천 제방뚝이 서쪽으로 반듯하게 나 있으며 뚝 옆으로 금산천이 흐른다.
2 3백미터 쯤에 서낭댕이가 있었다. 여기서 601번 도로는 우회하여 제원에서 군북면으로 간다. 영동 양산에서 오는 68번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이기도 하다. 이 도로를 따라 좌회하여 올라가는 길이 나의 학교 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제법 차도 많이 다녔다. 그만큼 큰 도로였다. 때문에 이 신작로에는 수시로 자갈을 깔았다 폈다를 했었다. 통학하는데 싫은 구간이기도 했던 곳이었다. 길바닥이 흙만이 아닌 길이었기에 얇은 운동화라 발바닥이 아팠었으며, 트럭이라도 한 번 지나치면 먼지와 기름 냄새는 우릴 힘들게 했다.
이쯤이면 온 몸엔 땀이 후줄곤한데 그 상황은 상상에 맡겨야지.
서낭당을 지나면서 바로 오른쪽은 바위산이고 왼쪽은 금산천이 활처럼 휘어져 산기슭을 치고 들어왔기에 도로가 굽다. 이곳을 지나면서 금산읍이 된다. 오른쪽으로 벌과 야트막한 산 기슭의 구릉에 마을이 있는데 신대리로 영채마을이다. 도로에서 영채로 들어가는 초입에 경사진 곳이 있는데 끊어진고개라 했었다. 본디 이곳은
산줄기였는데 도로를 내면서 산줄기를 잘라 길을 만들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리라. 이 끊어진고개 왼쪽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고, 반대에는 영채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끊어진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으로 논과 밭이 있고, 그 뒤로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는데 공동묘지였다. 묘들이 화약딱지 돋음처럼 정연하게 널려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금산경찰서가 거창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
이제 신털바우(흰털바우)를 돌아서면 학교가 보이고 탑선이 쪽으로 학교에 드나들었었다.
여름날이면 땀이 땀이 범벅이 됐을 텐데, 그와 관계된 기억이 영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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