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3일, 금남정맥 길 때 아침부터 삐걱댔었는데, ....
어제부터 아침 7시에 떠나겠다며, 점심은 간단하게 빵 조각으로 싸 달랬었다. 그게 배려라고, ....
새벽 일찍 잠을 깨니 여섯 시가 넘어 있다. 곤히 자는 아내를 깨우며 여섯 시가 넘었다며, 빨리 일어나라 했것다.
마누라 반응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오는데, 다섯 시가 갓 넘었단다. 쬐그만 종발시계 바늘이 너무 가늘어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다음은 여섯 시 30분이 넘었는데도 밥솥은 빨간 불이다. 주황빛이 돼야 밥을 풀 수가 있는데, .... 성질이 급한 나는 말은 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어지러이 왔다갔다 한다. 결국 어제 남은 밥을 렌지에 데워 급히 밥상을 꾸려냈다. 퉁명스럽게 나는 말했다. 7시에 못 나가면 2시간이 늦는단 말야!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니, 밤 열 시가 훨씬 넘었었다.
백암마을 가는 길-원대양길-
금산에서 8시 30분에 출발하는 역평, 건천 행 시내버스를 타고, 대양리 입구에 내리니 8시 56분이다. 대양리 살다가 금산에 살며, 이 대양리 땅에 농사하는
두 남자가 함께 내렸다. 그들은 원대양길 입구에서 헤어져 대양로로 가고, 이제 홀로 구면이 된 원대양길을 걷는다.
전답에 나온 농꾼둘이 제법 많다. 밭매는 이, 고추밭에 소독하는 이, 논을 둘러보는 이 등, .....
운무로 시계가 답답한 산경을 안타까워하며, 백암마을 뒤 백암산이 안개로 깜싸져 산봉은 없다.
지난 장마 때, 휩쓸린 개천 변이 어지럽고, 개천을 따라 뱀처럼 꾸불거리는 길도 상채기가 여기저기 보인다.
빗물에 쓸린 인삼밭, 갯물이 범람하여 뒤덮인 논, ...... 상처투성이인 근경만 가슴아프다.
마을 앞에 거의 이르렀을 때 오른쪽으로 둥구나무 곁에 비(碑)가 보인다.
육백고지전적비이다. 금산 사람들은 육백고지 전투의 치열했음을 모르는 이 가 없을 정도이다.
마을마다 그 전투에서 죽거나 다치지 않은이가 없을 정도이다.
이 마을 앞에 비가 세워졌다면, 육이오 때 심하게 상처 받았겠다 싶었다. 이 평화로운 산밑에 그런 슬픈 사연이 묻혀 있구나.
마을을 지나 풀투성이 농로를 따라 첫 번째 골짜기로 지난 번에 내려 왔는데, 오늘은 한 산줄기를 지나, 밭이 있는 오른쪽으로 붙어, 잘록한 능선으로 붙었다.
어렵지 않게 능선사거리점에 다달아 백암사거리로 쳐올라갔다.
빗방울이 듣는지, 떡깔나무잎이 툭툭댄다.
올라올 때 농부들이 농약을 치고 있었는데, 비는 안 오겠지 했다. 그들은 경험으로 비가 오나 안오나를 귀신같이 잘 알기에다.
나도 오늘 비가 안 올 듯해서, 우의를 안 무거운 일회성 비닐의 것을 챙겼기에 그들을 믿었는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나 폭우를 두 시간 가까이 맞았었다.
금남정맥 백암사거리 시작점에 이르렀다. 그 오른쪽 10m쯤에 헬기장이 있으니, 전망좀 보러 가 봤는데, 아무것도 안 보인다.
맥 산행의 백미는 용솟음치는 산줄기를 우러르는 데 있는데, 오늘은 조짐이 심상찮다. 이 때 시간이10 시 9분, 입석 사거리 열 시 44분, .......
비닐우의를 걸치고 장대비를 맞으며 두 시간 가까이를 코앞만 보며 청승스럽게 간다. 웬놈의 산대숲은 그리도 많고 깊은지!
바지는 사타구니까지 다 젖었고, 윗옷도 끈적거린다.
그러나 더위는 모르겠다. 피서 한 번 잘한다 싶었다.
오른쪽으로 뚫린 전망암에 이르렀을 때 비가 멎었다.
앞이 캄캄한 전망은 있으나 마나다.
시간은1시 45분이다. 노란 비닐우의를 나무에 벗어 걸쳐놓고, 허공을 향해 배변을 하고, 방석을 꺼내 바위에 앉는다.
눈물겨운 빵 조각을 입에 넣는다. 나름대로 입에 댕긴다. 물도 마시고, .....
그런데 갑자기 운무가 바람에 날렸나!
구절양장 같은 꼬불길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다. 금새 없어지니 아쉽다. 디카 꺼낼 틈도 없이 사라진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꼬불길이 완주군 운주면에서 올라오는 싸릿잿길이었다.
태평봉수대를 보고 작은싸리재를 내리니, 산꾼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한양에서 왔댔는데 네이버에 '하늘소리'라는 블로그를 갖고 있으며, 연속으로 8일 예정으로 금남정맥을 하고 있는데, 어제 모래재를 올라
치암목재에서 일박하고 오는 중이고, 다른 한 분은 전주에 사는 이로 치암목재로 금남을 하다가 이를 만났다 했다.
이이도 네이버에 '전북의 마루금'이라는 블로그가 있다 했었다. 그러면서 정맥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을 신기해 했었다.
내가 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하니 우리 둘만을 만나고서 하는 소리였었다. 정맥길에 한 사람도 못 만날 때가 태반이라며, ......
그들은 여기서 접고, 전주로 내리려는가 봤다. 서울 산꾼도 전주로 가서 묶고, 전주사람 차로 내일 이곳 작은싸리재에서 이어 나간다 했다.
그들은 나를 걱정했다. 지금 거의 네 시인데, 그들이 부른 택시로 함께 하산하잖다.
사양하고, 금만봉을 거쳐 싸리재로 내리겠다 했었다.
뒷일이지만 그들 말을 들었더라면 알바는 없었을 것이다.
항상 후회는 뒤에 오는 일, 누가 오늘처럼 대형 알바를 할 줄 알았겠는가.
금만봉 오르니 4시 14분이다.
이제 싸리재만 찾아 내려 대불리 마을 도로로 내리면 된다. 시내버스를 타고 운일암이나 주천에 가면 금산 가는 버스가 제법 있다.
금만봉까지는 한 번 왔었고, 치암목재에서 장군봉이나 해골바위도 왔었다.
그러기에 처음 오는 길도 알바없이 왔는데, 까짓것이었다.
그런데 한 4 5십분을 걸었는데도 싸릿재 표지가 안 보인다. 맥길 표지기는 많은데, ........ 오르고 내리고 하면서 전망은 흐려서 종을 못 잡겠다.
그 큰 운장산도 안 보이고 장군봉도 가늠을 할 수 없다. 건너편에 있는 높은 산이 장군봉이겠다 싶은 안부에 왼쪽 골짜기로 가는 길이 보였다.
아마 요 길이 싸릿재 하산로겠지 했었다.
한 번도 안 내려본 싸리재 하산길에 10분만에 큰 계곡물에 이르고, 길을 잃어버린다.
이런 때는 계곡물을 따라 내려 가면 된다.
물이 너무 좋다. 등산화 신은 채로 정강이 깊이의 물도 사정없이 빠진다. 옷은 이미 다 젖어 있으니 문제는 없다.
좋은 계곡은 디카에 담고, 때로는 더 깊은 곳을 딛고 신발을 힘있게 딛어 양말과 등산화를 세탁한다.
알바 길에 만난, 운주계곡 始源이 되는 이 물을 따라 피목마을을 와서야 알바인 주 알았다
물 묻은 바위는 본디 미끄러운데, 이 골짜기 암반들은 물 묻은 등산화에 찰싹 들어붙어 미끄러지지 않으니, 신비롭기까지 했다.
아마 때 묻지 않은 계곡이라 그러리라 생각됐다.
건너편에 꾸불꾸불한 도로가 보이는데, 그게 치암목재에소 내리는 길이라 싶었다. 너무 내리기 전에 이제 멱을감고 가야겠다 했다.
머리도 감고 양말도 빨고 등산화도 빨고, 바지도 벗어 헹구고, ...... 어이 시원하다!
계곡물을 벗어나 도로에 오르니, 아니 치암목재에서 내리는 도로가 아니라, 임도다. 시간은 6시 24분, 골짜기를 빠져나가면 대불리 어디겠지 했다.
그럴 듯한 포장도로도 나오고, 이어서 훍벽으로 빚은 펜션이 나오는데, 전선주가 없다. 때문에 발전기인 듯한 소리가 윙윙거린다.
이번 홍수에 포장길에 자갈들이 수없이 깔려 있는 채이다. 이어 금고당로라는 거리 표지가 나오고, 이어 피목교가 나타난다.
그제서야 피목이라는 지명이 언뜻 생각나고, 혹시 운주계곡인가 싶었다.
유원지가 지천인 운주계곡 금고당로를 밟아 피목에 이르렀다. 7시 13분이었다.
피목마을은 온통 피서인파로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비 맞아 아래 위가 다 젖은 옷으로 홀로 내리는 나, 정말 초라할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주로 젊은이들로 활기차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저기 마을버스가 보이지 않나!
달려가 보니, 기사가 문은 닫은 채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노크를 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청소가 끝났는지 문 열고 나오며, 이 버스 오늘은 안 가고 내일 새벽 일찍 간단다.
충격이었다.
이제 해가 지었는지 어둑어둑하다. 갈 길은 더욱 막막하다.
절망만 하랴! 즐기자.
물은 왜 이리도 많고도 맑은가! 물소리도 좋고!
그러나 한 시간 넘게 걸으니 좋은 경도 물린다.
어둔 길을 제법 걸었다. 여기서 대둔산 가는 17번국까지의 거리도 나는 알지를 못한다.
주말이라 나가는 차, 들어 가는 차가 제법 많다. 털거덕거리는 찻소리에 뒤돌아 보니 트럭이다. 손을 드니, 그가 섰고, 길을 물었다.
여기가 운주계곡 맞습니까? 맞단다.
그럼, 대둔산 가는 길까지 얼마나 되냐니까, 7km쯤 된단다. 하이고 했었다.
그 기사 좀 가더니, 차를 멈추고, 제가 거기까지는 안 가기에 곤란하고 좀은 태워다 준다 했다.
감사히 차 짐칸으로 올라, 1km 신세를 졌다. 옷이 젖었기에 내가 스스로 짐칸으로 올랐었다.
이미 7시 45분에, 이미 집식구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했었다.
차에 내려 또 걷고 걸어, 발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운주계곡물을 따라 흐느적흐느적 지친 몸을 끈다.
농로 같던 길이 어떤 다리를 건너며, 중앙선이 그려진 멋진 포장도로로 변한다. 그런 길을 또 걷고 걸어 넓은 펜션께서 걷기를 접는다.
천등산 휴양촌(?)인가에서다.
마눌을 만났다. 그 때 9시 20분이 좀 안 됐었다.
백암사거리 능선 금남정맥에 올라서, 작은싸리재를 지나 금만봉을 찍었을 때 네시 14분이었다.
거기서부터 금남정맥을 벗어나 알바를 했으니, 거의 다섯 시간을 알바를 했구나! 대단한 기록이다.
7시 13분 피목교를 보고서야-그러니까 세 시간 후에야- 비로소 알바를 한 줄 알았으니, 참 한심하기도 하다!
그러나 내 등산사상 최장의 알바 기록을 세웠으니, 양각산 등산 역사에 의의가 있다고나 하자.
역사란 좋은 사건도 있지만 아니 좋은 일도 있지 않은가.
금남정맥을 알바한 게 아니고, 하산 길만 알바했다.
치암목재에서 금만봉, 또는 장군봉까지는 몇 번 했으니, 이제 치암목재에서 주화산을 찍고 모래재로 내리는 일만 남았다.
또 시간나면, 장안산을 딛고, 무령을 건너 영취산을 밟고 백두대간에 몸을 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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