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월상계택(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양각산 2010. 4. 27. 06:06

 대전둘레 산행에 '가을 하늘'이라는 닉을 쓰느 분이 있는데, 그는 40대의 젊은이로 한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다.

대전 주변의 문화재를 모두 답파했고, 뿐만아니라 체계적인 이론으로 해설을 하고 있어서,

대둘회원 모두가 잘 배우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실토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내 산행 사진에 댓글을 달기를, 조선 중기에 '월상계택'이 있고,

대둘에는 '아양돌산(아우라지 양각산 돌까마귀 산아)이 있다고 했다.

월상계택이란 용어를 처음 접하는 나는 4대문장가라는데 깜짝 놀랐고, 싫지 않았으나 당황스러웠었다.

내 글을 잘봐줘 고마우나 과분한 평가에 송구스럽다고나 할가.....

 

 여하튼 여기서 접고 '월상계택'을 인터넷을 뒤져 정리한다. 

 
 
   * 조선 중기에 문장에 뛰어났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 등 네 사람

사대문장가()라고도 하며, 이들의 호를 한 자씩 따서 월상계택(谿)이라고도 한다.

선조 때부터 인조에 이르기까지 문풍()이 크게 일어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들 네 사람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송팔대가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은 점, 주자학적인 사고가 규범이 되고 있는 점,

이들 모두가 화려한 가문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한 점 등을 들 수 있다.다.                                                                                                        

 
 

                                                                       

 

                                                                                              
 
 1. 月沙 이정구 : 한문 4대가의 한 사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추애(秋崖)·치암(癡菴)·습정(習靜).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의 문인이다.
                     14세에 승보시에 장원한 뒤, 22세에 진사,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의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지어
                     명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대제학에 올라 문사(文詞)에 능한 자들을 발굴했고, 중국을 내왕하면서 100여 장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펴냈다.
                    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좌의정·우의정을 지냈다.
                    문학을 경세치용(經世致用)의 도구로 보았으며, 그의 문장은 당시 관인문학을 선도하는 전범
                   (典範)을 보였다. 시문집으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2. 象村 신흠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년 〈춘추제씨전〉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 晴窓軟談〉·〈구정록 求正錄〉·〈야언 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권 22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을 남겼는데, 1981년 경문사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을 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 계곡(谿谷) 장유 : 장유(張維, 1587년1638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판서 운익(雲翼)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였다.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1]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장생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최명길, 조익, 이시백과 절친하여 사우정(四友情)으로 불렸다.[2]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으며 1605년(선조 38) 향시에 장원을 했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를 했다.

                  이후 예문관·승문원 등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1]

                  관직생활을 하던 중에 김직재의 옥이 일어나면서 매제 황상이 김직재 옥사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체포되면

                  서 그는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2년 동안 장유는 고향인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다.

                  이 무렵에 대가의 문장을 거의 다 접했으며, 저서 《묵소고를 엮기도 했다.[1]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고, 이조좌랑과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모시던 국왕을 쫓아낸 일을 부끄러워 하였다고 한다.[1] 그는 공신이면서도 공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소장 관인들을 보호하다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1]

                 인조 14년의 병자호란 대에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했으며, 또한 최명길과 함께 양명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의 사상이 편벽(偏僻)함을 지적하여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불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有識無識)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학(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

                 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은 장유에 대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하였다.[2]

                 그는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의(非議)함을 변박하였으며, 천문·지리·의술·병서(兵書)·그림·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신흠·이식·이정구와 더불어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로 꼽혔다.

                 1637년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의 상소 끝에 물러났다.

                 사후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

                 그의 많은 저술은 대부분 정묘호란 때 분실되었고 《계곡집(谿谷集),《계곡만필(谿谷漫筆),《음부경주해(陰符

                 經主解)》가 남아 있다.

 

 4. 택당(澤堂) 이식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덕수(德水). 자 여고(汝固). 호 택당(澤堂). 시호 문정(文靖).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

                           고 낙향,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

                           (義州)에서 구치(拘置)되었으나 탈주하여 돌아왔다.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다.

                          저서에 《택당집(澤堂集)》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 이 월상계택을 달리 한문 사대가라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