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대전문화답사 대전둘레산길 제3구간에서(신채호 생가, 정생동 백자 가마터)

양각산 2010. 3. 23. 11:01

 

 *어디로:소호동-291봉-1구간길-금동고개-2구간길-돌탑봉-떡갈봉-443봉-어남동 도리뫼 단재 신채호 생가-쇠재-사기점골-

             정생동 백자 가마터  

 *얼마나:약 13km 7시간 예정(9:30~16:40까지 산행)

 

  돌까마귀님이 주관하는 산행을 하자면, 점심 후 신참 신고식과 여흥 행사가 있다.

 이 때 김선건 대표가 참석할 때, 빠지지 않고 '영자 송'에 이어 "에헤야....."가 등장하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담겼단다.(가을하늘) 

가운데 분이 김선건 대표 

 "에헤야 가다 못가면 데헤야 쉬었다 가지

 호박같이 둥근세상 둥글둥글 삽시다."

 

김선건 대표님께서 후렴 댓구로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십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1930년대 말경 만공스님이 예산 수덕사에 머무를 때의 일입니다.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하던 어린 진성 사미(오늘날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는 어느날 사하촌에 나무꾼따라 나무하러 갔다가 이 노래를 배워옵니다.

어린 사미는 이 노래의 뜻도 알지 못하고 절안을 왔다갔다 하며 제법 구성지게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만공 스님이 이 노래를 우연히 듣고 어린 사미를 불러 세웠습니다.

"사미야, 네가 부른 그 노래 아주 좋은 노래구나. 잊어 버리지 말거라."

"예, 큰 스님"

진성 사미는 큰 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습니다.

어느 날인가 왕궁의 상궁과 나인들이 만공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요청했습니다.

만공 스님은 쾌히 승낙하며 진성사미를 불러들였습니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번 불러 보아라"

진성 사미는 큰 스님이 노래를 칭찬해 준 적도 있고 해서 목청껏 소리 높여 멋들어 지게 노래를 불러 댔습니다.

"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사미가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의 청신녀들은 얼굴을 붉힌 채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습니다.

이때 만공 스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바로 이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얻을 것이 많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본래 참 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악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 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고 이 땅에 태어난, 누구나 뚫린 부처의 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멍텅구리요, 그 뚫린 이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불법이오.

삼독(三毒, 탐내는것, 화내는 것, 어리석은 것)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은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 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본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못 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인 것이오."

 

만공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하며 감사히 여겼습니다.

그후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순종비 윤비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사미를 궁궐로 초청, 딱따구리 노래가 왕궁에서도 불린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 이상, 딱따구리 보다는 나은 모습으로 살아야겠지요.  -가을하늘-

 

 

신채호님 생가지(生家址)

 

 신채호 선생은 1880년 진외가(陳外家: 아버지의 외가)인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령신씨로 신숙주의 후손입니다.

신숙주는 아시다시피 조선초기의 정치가,외교가였지만 사육신과 뜻을 함께 하지 않고 권세를 택한 그리하여 변절의 상징인물로 통하는데, 후손 중에 무서우리 만큼 매섭고 차고 그리고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다간 단재와 같은 후손이 태어났다는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인데요~세상에 이런 일이....    단재 선생은 일제치하에 허리 굽히는 것을 싫어해 서서 세수했다고 합니다.  옷은 다 젖고...) 

 태어나서 8세 까지 어남동에 살다가 고령신씨 집성촌인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를 갑니다.

그 이유는 부친 신광식이 단재선생 8살 때 사망한 것과 관련이 있을 듯 합니다.

 

16세에 향리에서 풍양조씨와 결혼했으나 부부간에 눈높이가 맞지 않았습니다.

이웃 처녀들처럼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일을 하다가 농사꾼 배필을 만나지 않고 단재와 같은 선비를 만난 것이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첫 아들을 낳은 후 단재가 외국 선교사를 통해 구해다 준 분유를 잘못 먹여 첫아들이 유체(乳滯)로 사망합니다.

단재가 독립운동 관계로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한 이유도 있었지만, 이런 이유로 사실상 풍양조씨와는 헤어집니다.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재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가지고 중국으로 갑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생활 속에서도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여러 역사 책을 씁니다.

망명 상활 중 40세때에는 연경대학 재학중이던 박자혜와 재혼을 합니다. 이때 신부 나이는 28세였습니다.

대만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관련, 국제 위체 사기문제로 대련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형무소에서 복역합니다.

뤼순감옥에서 8년의 옥고를 지내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유언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사합니다.

 

 유해는 귀래리로 모셔와 안장합니다.

때가 일제시대라 비문은 짓지 못하고 묘석만 겨우 세웁니다.

단재선생은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사관에 바탕을 두었던 역사학자인 동시에 언론인, 문학가였습니다.

단재선생이 쓰신 글을 다시금 읽어보아도 매우 잘 쓴 문장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2009년도에야 국적회복이 되었습니다.

(일제치하에 호적등록을 하지 않아 재작년까지도 무국적자였습니다.) -가을하늘- 

사진 가운데 흰 모자가 가을하늘

 

정생동 백자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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