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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 신라비(봉평 신라비)

양각산 2010. 8. 24. 14:28

 

 국보 242호 울진 봉평 신라비

  

종 목 국보  제242호
명 칭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8.11.04
소 재 지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시 대 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울진군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봉평신라비 /봉평신라비(신라), 국보 제242호, 높이 ...

국보 제242호.높이 204㎝. 사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1면에 10행, 39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각 행 당 글자수는 일정하지 않다. 건립연대는 524년(법흥왕 11)이다. 비를 세운 목적은 거벌모라(居伐牟羅) 주민의 어떤 잘못에 대한 처벌과 재발방지를 위한 경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문은 내용에 따라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문단은 소교사(所敎事) 주체인 13명의 인명이 열거된 부분이고, 둘째 문단은 별교령(別敎令)의 내용을 적은 부분, 셋째 문단은 처벌대상자와 책임관을 적은 부분, 넷째 문단은 비의 건립에 관계한 인명을 적은 부분이다. 비문은 한자를 사용했으나 한문식 문체와 신라 고유의 표기방식이 섞여 내용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법흥왕대까지도 국왕의 소속부가 명기될 정도로 신라 6부의 독자성이 강했다는 사실과 함께, 지방 지배의 방식, 노인법(奴人法)의 존재, 신라 관등제의 발전과정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 그동안 회의적인 견해가 일부에서 제기되었던 법흥왕대의 율령반포 사실에 대해 확고한 증거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큰 중요성을 지닌다.

 

 
 * 찾아가는 길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있으니, 밑에서든 위에서든 7번국도를 타고 접근하면 된다.
                       새로 개설한 7번국도를 타든, 구 7번국도를 타고 해변로로 가든, 봉평신라비 이정표가 있으므로, 갈색 표지를 유념하며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7번국도를 타고 영덕을 거쳐 울진군에 이르고 죽변면 봉평해수욕장을 지나면 초평교가 나오고, 곧 이어 좌회하는 길로 2백m쯤의
                       왼편에 큰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안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