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둘레(군계)에 갈티고개가 있다.
(갈티재에서 평댕이쪽)
이 고개를 몇 번 넘었었는데 처음 넘은 때는 한 50 년 남짓 됐을 성싶다.
지난 시제 때('08. 11. 3.)에 시제를 모신 후에 이 갈티재를 다시 왔었고 9월 금산둘레산행 때도 왔었으니 금년만도 두 번째다. 내 나름으로는 큰 감회가 있기에서다.
이 갈티재는 금산군 부리면 갈티 마을에서 무주군 부남면 평당리로 넘나드는 고개로 평댕이 사람들이 갈티재로 부르고, 이쪽 부리면 사람들은 평댕이재로도 부르기도 한단다.
이 갈티재는 나의 할아버지 즉 祖父께서부터 恨이 맺힌 곳이란다.
조부의 아버지 그러니까 증조부께서 虎患으로 서른 좀 넘어서 돌아가셨단다. 그 때 조부님은 9살 때란다. 증조부님은 매우 가난하셨고, 은진송씨 증조모님은 조부(9살 소년)를 떼놓고 시가로 아주 가버린 것이었었나 보다. 어린 할아버지는 9살로 그 어머니를 찾으러 이 갈티재를 울며울며 넘기를 수없이 했단다. 아마 외가가 이 갈티재 넘어 평대이마을이나 한티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외가에 있을 리 없었다. 타집을 갔겠지. 그러니까 가는족족 아니 계시니 그렇다고 외가에서 거둬주지 않았을 테고 ...... 그래서 이십 리가 넘는 이 길을 울며불며 넘으셨단다. 이 한많은 갈티재를 낮뿐만이 아니고 밤길까지도......
할아버지는 매우 왜소하셨단다. 부모 사랑도 못 받고 가난하여 먹거리도 보나마나였을 게고.... 1860년대의 이야기다.
지난 이야기가 19세기 이야기라면 지금의 이야기는 20세기 이야기다. 6.25동란, 지금은 한국전쟁이라고 하나? 우리 아버지 대의 일이다.
아버지는 삼 형제로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분들로 조상 모시는데도 극진하셨었다. 부남면 한티에 조상의 묘소가 많았는데, 벌초 때 또는 시제
때 등엔 한 번도 빠지는 일 없이 다니셨다. 종사일의 책임자를 맡기도 하셨고 사당 짓는 큰일도 해내셨기도 했다.
6 25 때도 빠짐없이 시제에 참여했었단다. 시제가 여러 위라 하룻밤을 한티마을에서 유하시게 됐는데, 그 날밤 빨갱이가 들이닥쳤었단다.
그리고 마을 젊은 남자들을 잡아들이고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나갔었단다. 작은큰아버지 차례까지..... 여차하면 죽임을 당할 찰라, 빨갱이 중 면식이 있는이가 알아보고, 이 마을 사람이 아닌 타향 사람으로 시제에 온 사람이라 말했었단다. 그래서 살아 남으셨는데......
그렇지만 그 충격이 어땧겠는가. 몇 년 못 살으시고 돌아가셨다.
이 아버지 형제와 내마테(안담, 내장) 일가들이 한 해만도 수 차례씩 넘나들던 고개였다. 이 갈티재가.....
나도 이 갈티재를 제법 넘나들었었다
아버지 따라 첫번 나들이는 아마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라나. 난 어려서부터 체력이 시원찮았다. 때문에 많은 시간을 방안에서만 보냈기에
방안퉁수라 비판 받았었다. 영감이란 별명도 아마 이런데서 생겼을 성싶다. 학교도 9살에서야 갔다. 싸움은 최고로 싫은 일이었다.
그 날은 더웠던 기억만 나니, 시제는 아니고 벌초 때가 아니었나 싶다.
마을 앞산을 앞동산이라 했다. 물론 뒷산을 뒷동산이라 했었고, 아름들이 소나무와 큰 참나무가 있는 곳을 참나무재라 했었다. 내 고향 안담은 삼면이 야트막한 산으로 막혀 있고 서쪽면만 논으로 뚫려 있다.
앞동산을 질러 넘는 잿길이 있는데 그 고개를 뱃마티고개라 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나룻터이다. 지금은 무지개다리가 놓여 버스도 하루에 수 십대가 건너다니지만 그 때는 나룻배를 타야만 했다.
강 건너 벌말에는 그 때도 신작로가 나 있었다. 갓바우를 지나고, 현내에서부터는 자갈길 신작로였다. 나는 짚신 신은 기억이 없으므로 검정고무신으로 걸었을 것이고 발이 아팠을 텐데 기억은 아니난다. 무척 더웠던 기억만 난다. 자갈도로가 걷는데 편치않음을 그 때 알았었다.
면사무소를 오른쪽에 두고 지금의 37번 국도로 계속가면 지심티(지삼터)가 나온다. 지심티 많이 전 오른쪽 산간 마을이 갈티다. 신작로를
버리고 지금은 도로지만 옛날엔 시골 가느다란 길이었다.
갈티마을은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한 가운데를 맑은 도랑물이 흐르고 그 도랑물 좌우로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그 도랑 따라 계곡으로 계속 올라가면 갈티재가 나온다.
갈티마을 추억은 시원함이다. 시원한 도랑물 아니 계곡물과 초가 지붕의 그늘에서 풍기는 훈향, 골목의 시원한 습습함, 나무 그늘의 서늘함.........
갈티재! 어떤이는 이 재를 평댕이재라고도 하는데... 이 재에서부터 힘이 부쳤겠지. 정훈 시인의 머들령이 떠오른다.
이 재를 넘어 평댕이 마을을 거쳐 한티재를 넘는다. 한티 사람들은 이 재를 평댕이재라고도 한다. 한티는 요즘 쉬운말로 고치면 큰재다. 10살 남짓 나이에 게다가 나약한 내가 넘기는 더더욱 버거웠을 게다.
한티재를 넘으면 그 곳이 한티마을이다.
아마 거리가 10km가 넘을 듯싶다.
백여 년 전에 나의 조부가 어린 나이에 걸었듯이 나도 그랬었었다. 한많은 갈티재를.......
서답날 금강 변에 증조부 묘소에 시제를 올리고 늘 입에 올리는 갈티재 얘기.... 전설 같은 실화. 한맺힌 갈티고개와 평댕이고개!
수로봉
갈티재는 지삼티에서 수로봉을 잇는 산줄기가 팍 내려앉는 안부다. 그러다가 덕기봉을 향하여 서쪽으로 산맥이 달린다.
지금은 갈티마을에서 평댕이마을까지 승용차로 갈 수 있지만 옛날엔 두 발로만 걸어야 갈 수가 있었다
갈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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