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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화서)에서 화령재를 가면서

양각산 2010. 10. 3. 17:42

 

 여행이라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산행은 더욱 아니니....

이 아리까리한 사진을 어디에 넣나? 고민스럽다. 버리기는 아깝고...... 그래서 이 곳에........

 

 2010년 10월 1일에 또 무모한, 대중교통만으로의 백두대간(화령재~개머리재)에 나섰었다.

동부터미널에서 아침 7시 10분에 떠나는, 태백까지 가는 버스인가를 탔는데 이 버스가 경부고속도 하행선을 타다가 옥천IC로 나와서 보은 방향 37번국도를

달렸었다. 그러다가 장계다리를 건너 대청댐을 왼쪽에 두고 달려, 현리에서 오른쪽 길로 어떤 재를 넘어 원남에서 한 사람을 내려주고, 좀 가다 관기로 들어가

손님을 태우려는데, 한 사람도 태우지 못한다.

다시 25번국도로 나와서 화령터미널에서 들어가 서니, 9시 30분이었었다. 

                       터미널에 들어가 시간표를 보니 위와 같다

                      손님이 적어 많은 차를 줄였나 보다

내가 타고온 버스

대전에서 화령 가는 버스 요금이 8500원인가로 알고 왔었는데 6400원만 받는다

알고 보니 보은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그렇고, 내가 탄 버스는 직접 가는 버스라 싸단다

 

이게 뭔가!

포도를 실은 차들이다

트럭, 경운기 등에 잔뜩 실린 포도가!!!!!

화령은 포도 주산지인가 보다

 

 

화령은 예나 현대나 치렬한 곳이었나 보다

 

25번국도에서 49번지방도가 여기서 분기되며 백두대간을 자른다

그리고 25번국도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거의 밟으며 몇 백 미터를 달린다. 화령재까지....

이처럼 국도가 백두대간 마루금을 달리는  다른 어느 곳에 또 있으려나!

국도가 백두대간 마루금이었다가 요 위로 들어 갔다가 다시 나오고

다시 요 위 산길이 마루금이다

 

 

화령재

                       화령재에서 백두대간 등로를 접어드니, 9시 5분이었었다.

                       화령터미널에서 쉬엄쉬엄 와도, 30여 분밖에 안 걸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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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머리재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내려섰다. 3시 27분이었다.

 개머리재는 소정재라고도 불리는데, 백두대간 모서 쪽이 소정리이기 때문인 듯하다. 

 

 

개머리재 마루금에는 온통 포도 밭이거나 사과 과수원이었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소정리 마을로 들어간다

  황간이나 화령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모서(삼포리)로 가려면 소정리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는 소정2리라는데, 이 마을을 선유동이라 했다

 

장구렁못, 지명이 흥미롭다!

 

 

여기는 지기재에서 내려오는 도로로, 석산을 거쳐 도안, 모서로 가는 길이다

 

 

 

 

이 개천을 경계로 소정리와 석산리가 갈리는 듯싶다

 

 

걷고 또 걸어서 모서 소재지에 이르렀다. 모서면 소재지(삼포리?) 중심가 이름이 '중화로'로구나

중화지구대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모서까지 걸어왔었는데 5시 40분이었었다.

    거의 두 시간을 포장도로만 걸어서 모서면 소재지에 이르렀다. 찻길을 걷는 것은 좀 지루하다. 그리고 피곤하기도 하고....

    2년 전에 탔던 버스정류장을 찾으려는데, 못 찾겠다. 파출소에 들러 물어 겨우 찾아냈다. 그러나 영업 간판이 내려졌었다.

 

   황간이나 화령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5시 30분에 끝이 났나 보다.

   2년 전에 타고 황간까지 갔었던 버스는 없어졌단다. 손님이 적어 폐쇄했단다. 그 버스를 목대고 여유를 부리며 왔는데, 낭패다.

 

   이제 집에 가는 방법이 문제다.

   택시를 불러 화령이나 황간으로 가야만 된다 생각하고, 택시를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다시 그 모서파출소로 갔다.

   좀 전에 갔을 땐 경찰 한 분만 있었는데, 이번엔 네 분이나 계셨었다. 또다시 그 분들의 도움으로, 황간보다 화령이 가까움을 알았고,

   모서에는 택시가 한 대도 없음도 알았다.

   화동과 화서(화령)에만 택시가 있단다. 화동쪽 택시는 무슨 과일 수확하느라 운행을 할 수 없다했고, 화령택시를 18000원에 불러줬다.

   친절한 경찰의 도움을 받았었다.

   우리 세대는 경찰을 무서운 존재로 알아왔었는데, 너무 따뜻해 놀라왔다.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는 시간에도, 차를 대접받았고, 포도도 한 송이를 먹으라 주는데 황송하리만큼 융숭했었다. 포도를 한 알 한 알 간신히 먹으니,

   맛이 없으면 복숭아를 드릴까요, 하는데......

    요즘 경찰이 이처럼 친절하구나 싶었었다.

   옛날 우리가 어렸을 적엔 애들이 울면 어른들이 '저기 순사가 온다' 했고, 그러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쳤을 정도였는데...... 격세지감이구나!

 

   * 대중교통만으로의 백두대간의 장점은 내 멋대로 다닐 수 있음이 장점이고, 다음으로는 비용이 비교적 적게 듦인데, 오늘은 곱으로 많이 지출했다.

    그리고 택시를 이용한다면, 내 생각은 순수한 대중교통이 아니라, 귀족 여행(귀족 산행)이다 싶다.

      오늘도 대중교통만으로의 백두대간은 실패했다.  

    이제 대중교통만으로의 백두대간을 접고 싶다. 접근과 탈출의 방법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서이다.

 

 * 중화지구대 : (중화(中化)지역, 돌구름 글에서 퍼옴)

     산천의 전통은 유구하여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오늘날의 도계(道界) 또한 변함없이 백두대간을 따라 마루금을 그었으니 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다만,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다 보면 몇 군데 대간과 도계가 어긋나는 곳이 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 마을은 강원으로 백두대간의 도래기재를 넘어갔고,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부석면 남대리는

  충북으로 각각 백두대간의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상주 화령 일대의 무려 6개의 면은 대간을 넘어 깊숙이 충북 땅으로 들어섰으며, 전북 남원 운봉읍을 비롯한 3개면은

  경남으로 대간의 여원재를 넘어 팔량치에서 도계를 이룬다.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상도 여섯 고을 - 속리산 갈림길에서 상주 길로 30리쯤이면 충북과 경북이 도계를 이루는 적암이다.

  풍수에서 십승지의 하나로 꼽는 명당을 품었다는 구병산(876m) 아래 그저 평평한 들판 위에서 엉거주춤 도계가 나뉜다.

  그로부터 백두대간의 화령까지는 30리 길이다. 속리산 형제봉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도계는 적암을 지나고 백화산(933)을 휘돌아 추풍령 위쪽 국수봉(684)에 이르러야 다시 백두대간과 만난다.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 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바로 중화지역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오늘날까지 중화지역이 경상도 땅으로 뿌리를 뻗은 것은 아마도 신라와 백제 마지막 국경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원의 팔량치 일대가 비록 백두대간의 동쪽이지만 전라도 땅으로 굳어진 연유도 비슷한 내력이 숨었을 터이다.

  낮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그 두 곳은 싸움의 결과에 따라 쉴새없이 국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 두 곳은 백두대간이 천연의 국경 역할을 잃었기 때문에 힘이 센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물론, 이는 사람이 걷거나 기껏 말이나 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종류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싸움이 있었다.

  얼마 전, 문장대 용화온천의 개발을 둘러싸고 충북과 경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사건이 그것이다.

  용화는 바로 화북면이니 경상도 땅이지만 백두대간을 넘어 온 탓에 그 물은 달래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

  수계이다. 돈벌이는 경상도가 하지만 수질 오염의 대가는 고스란히 충북의 몫이다.

  결국 경북 쪽의 개발 포기로 단락을 맺은 이 사건은 지방의 경계가 백두대간을 따르지 않았던 탓에 일어난

  분쟁이었다.

  삼백(누에, 쌀, 곶감)의 고장 상주는 신라의 두번째 도시였고 삼국시대의 중요한 격전지였다.

  아자개와 그의 아들 견훤의 주활동 무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와 상주를 합하여 8도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경상도의

  지명에서 보듯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지역이다.

  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팔역지에서「조선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상주와 선산에 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