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둘레산길

양각산~월영산 마루금 종주

양각산 2010. 6. 1. 08:17

  대충산사 정기 산행, 양각산에서 월영산까지의 마루금 밟기가 2010년 5월 30일 일요일에 있었다.

 산 꾼 화장님등 17 분이 참석한 이 산행은 예정 시간보다 2 시간 이상 더 걸려 완주했다. 중도에 그만두고 싶은 맘을 누루고 월영산을 찍고

 원골 날머리를 나오니 거의 일곱 시가 되었었다.  

양각산에사 -사중사님 사진-

 

노정:수통대교 양각산들머리-양각산산장-양각산-굴천이재-삼도봉-피레기재-성주산-백골재-기웃재-자사봉-월영산-원골

 

 

  서대전역 1번출구 모임 시간 7시 35분에 맞추려 나가며 보니 신록이 너무 좋아,  한 컷 누루고....

  서대전역에서 이스타나 승합차를 타고, 산내 대성삼거리에서 장끼님과 초향님을 태우고 17번국도를 달려 금산터널을 지나 추부에서

 37번국도로 합류하여 부리파출소를 조금 지난 삼거리에서 적벽강길로 좌회하여, 아래 마을 도파리에 이른다.

 이 마을과 수통리를 연결하는 다리가 수통대교인데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양각산 들머리 이정표와 정자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 곳에서부터 시멘트포장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양각산산장이 나오는데, 거기서 차를 돌릴 수 있다.

 길이 너무 좁아 차라도 만난다면 큰 낭패일게다.

  아홉시 10분쯤부터 산행.....

금강이 서쪽으로 흐르는데, 강 왼쪽이 평촌(벌말)이고 무지개다리 건너 마을이 신촌리이다

사진 왼쪽 위가 금산 진악산이고 그 오른쪽으로 금산읍이 하얗게 보인다

 

 

 

-아우라지님 사진-

 

 

수통리

 

양각산에서 서대산 조망

 

성주산과 그 마루금

두 양각산 사이로 난 임도 날망 광장

가운데 산줄기가 전북(무주군)과 충남(금산군)의 道界이다

지나온 양각산

삼도봉인데 제법 큰 산성이다. 어쩌면 노고성과 관계될 듯싶다

 

윗 임도는 양각산 가는 것이고, 아래 것은 원통골을 빠져나가 어재리로 내리는 임도임

 

삼도봉에서 점심을...

우리가 앉은 이 자리는 충남만이 아니다.

전북 무주 땅일수도 있고 충남 금산 땅일 수도 있다. 아니면 충북 영동 땅일 수두 있겠고.....

 

 

피레기재

 *피리기재(피레기재) : 피리기(피레기)재는 내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이름이다. 

                             마을의 어려운 집의 여자들이 피레기재를 넘어, 학산에서 대추 등의 과일을 떼다가 마을에 팔아서 생계에

                             보탰었는데, 그 때에 들었었으니 내가 초등학교 다니기 전으로, 6.25 직후 무렵일 듯하다.

                              1960년대에 그 곳을 갈 기회가 있어 올랐었을 때, 그 재 날망에는 큰 참나무 두 그루가 양 쪽에 있었는데....

                             2000년대에도 군계 산행이나 도계를 지날 때 보니, 그 큰 참나무가 있는데, 생각보다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었다.

                              왜 이 재를 피레기재라 불렸는지를 이제야 알겠다. 피레기재 너머에 모정리가 있는데, 그 자연마을에 피리기가

                             있다. 그런 연유에서 어재리 사람들이 피리기마을로 넘었었기에, 피레기재라 불렀었구나 싶다.

 

피레기재 좌우에 모두 성이 있으니......

 

 

무엇하시나?

 

 

 

 

 

풍경소리님과 도토리님

 

 

 

 

 

신촌리

 

용화리(가운데 반도 같은 곳)

 

점심 먹던 삼도봉 너머에 적상산, 적상산 너머에 덕유산 향적봉이 아련하다

성주산

 

 

 * 모정리의 자연 마을 :

     모정, 동모정(모정말, 띠골, 피리기, 큰담) : 골말, 음지담, 양지담 등이 있다.
     비석동(비석골) : 무가 서쪽 산골에 있는 마을로 근처에 묘비가 많다.
     신기동(새터) : 뚝 넘어 새동네다.
     용산동(방아골) : 죽촌동 북쪽마을로 지형이 방아처럼 생겼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죽촌동(대밭말, 대나무골) : 황산리의 위뜸마을로 뒤에 대나무밭이 있다

 * 마을 유래 : 모정은 조선조 이괄(고성 씨)이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반정에 성공을 거둔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인조 2년 난을 일으켰는

                   데 이괄은 부하에게 피살되고 역적으로 몰려 3가족이 멸하게 되자 가족 중 (내 삼정에 처음 정착한 이사복의 가족) 한 분이 이

                  곳으로 피신을 와서 땅굴을 파고 지붕에 띠를 입혀 위장하고 살았다하여 띠모(茅)자와 땅속의 굴에서 살고 있는 작은 집(亭)이

                  라 불러 모정이라 칭하였다.
                   필력은 옥천군 양남면에서는 가장 끝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필력이라 했는데 필력은 마을수가 12동네(사락호, 비석골, 삼정,

                  내삼정, 방애골, 대밭말, 띠골, 안앞재, 앞재, 대유곡, 덕은터, 수반들)로 현재 무가동에서 압치 쪽에 있던 곳은 모두 필력 또는

                  피리기라 하였음(학산면 향토 연구가 정승래 씨의 증언)

 

지내리

 - 지내 광평은 행정리동은 2동이나 한 마을로써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지내․광평(넘벌) 마을의 지웃골은 신라와 백제의 전쟁터로 유명하여 성주산 노고산성은 성곽 흔적이 지금도 약 320m 가량 남아 있고, 전쟁 중에 백제의 성왕이 머물기도 하였다고 하며, 넘벌이라는 명칭은 삼국시대 흔히 쓰던 지명인 것으로 보아서 그 때부터 생긴 마을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지내리는 1800년경 모리 입구에 큰 저수지를 만들면서 못 안쪽마을이라하여 행정구역 개편 시에 명칭을 정하였다.
250여년 전에는 구수골(광평에서 모리로 넘어가는 골짜기가 있었음)에 동네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곳에는 도둑이 많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양남일소면 당시에는 근방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지내 광평은 1914년 3월 말까지 양남 일소면의 면 소재지로 1917년 면제가 공포되어 정식 업무를 보기까지 면 의장이 군수의 보조 기관장 역할까지 했던 곳으로 집무 장소는 581-1번지의 여씨 서당이었다고 한다.
세종때 종일품 숭정대부 판중추부사를 지낸 문절공 정수충 선생의 영정을 모신 서당이 광평 동에 있으며 군수를 비롯한 인근 마을 지역 유림(추현계원 150여명)들이 기일(음력 9월 6일)을 택하여 기제를 올리고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아 여러개의 서당이 있었다하며 훈장들의 유덕비가 여러개 있다. -영동 문화원-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알바 길에서 만난 성 흔적, 이곳이 정통 군계이자 道界지만

이 산길은 지내천으로 급히 내렸다가 다시 성인봉으로 오르는 벼랑길이다. 맥이 물에 끊긴다.

오늘의 산행은 마루금 잇기로 지웃재로 가야했었는데...... 도로바 했다

 

 

백골재(늠벌재?)로 들어온 재인데.....

 

  백골재를 지나 이런 재를 만나는데 서낭댕이처럼 돌무덤이 쌓여있다

큰재일 듯싶다, 혹 지웃재(기웃재)는 아닌지?

 

자사봉, 다시 도계(군계)가 되는 봉으로 월영산까지 이어지다가 금강에로 마루금이 끝난다

갈기산

 

 

 

천태산

 

 

서대산과 천태산

 

지나온 산줄기

 

어재리 마을과 용화리 마달피수련원

 

월영산

 

가선교와 천태산

 

 

 

 

 

 

 

서대산

 

 

 

 

양산덜갱이

 

원골 어느 어죽집에서

 

 

2차를.....

 

자랑스런 완주자들(사중사님이 없군!)  

 * 함께한 이 : 아우라지 통아저씨 산꾼 허허자 영영영 장끼 풍경소리 초향 날맹이 사중사 에이스 상수리 도토리 막둥이 철한 휘앙새 양각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