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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夷의 근원과 밝달 한겨레

양각산 2017. 2. 14. 10:13

동이東夷의 근원과 밝달 한겨레

김 용 수

동이東夷의 근원과 밝달 한겨레

- 차례 -

들어가는 말 1.

동이를 살피는 뜻 2.

한자문화권 속의 동이 3.

중국고전 속에 드러나는 동이 5.

중국문명을 개척한 동이의 활동 8.

겨레의 시원과 줄기 11.

다시 보는 동이 12.

한사군 대동강 유역 설은 폐기될 때 15.

실담어로 살핀 동이 16.

천문학 선두 동이 18.

사카족과 동이 20.

맺는 말 22.

-미주尾註 : 중천축국은 어디인가 ? 25.

 

동이東夷의 근원과 밝달 한겨레

                                                                                        김 용 수 / 조각가

들어가는 말

나는 누구인가? 사람이면 한 번 쯤 묻는 이 질문과 같이,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도 같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요즈음 시민들의 역사인식은 어느 때 보다 높다. 중국 측 사료를 일반인들도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지금까지 거짓 역사를 배워왔다는 자각이 싹트고 천문학, 신화 해석학, 유전학 등이 가세하면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하는 열기가 뜨거운 것이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이 열기를. 진보는 편협한 민족주의로 몰고, 강단사학은 국수주의로 몰고, 보수는 식민사학 기조 속에서 애국을 강조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허나 이 들은 모두 초점이 잘못된 것이다. 모든 제 이론은 ‘사실’을 근본으로 해야 설득력이 있다. 사실이 왜곡된 이론은, 거짓에 거짓을 덧대는 악 순환에 빠질 확률이 높다. 베이컨은 이를 ‘극장우상’이라 정의 한 바 있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식민사학이 그려 놓은 영상에 속아왔는가?

더욱이 진보라는 사람들조차도, 역사 정체성 문제와 민족주의를 잘못이해 하고 있다는 데 더욱 심각한 것이다.

3세계 민족문제는, 제국주의로 야기된 독일 게르만(아리안) 우선주의나, 일본 천황주의와 같은 패권 민족주의와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3세계 민족문제는 19~20세기 제국주의가 끊임없이 쪼개 놓은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부터 풀어야한다.

수행자가 산으로 가는 것은 깨달음을 통해서 모두에게 나누려하는 것처럼. 우리 역사 회복은 다른 나라와 분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필요한 덕목이다.

세계가 꽃 시장이라면, 우리는 그 시장에 핀 한 송이 무궁화라야 한다. 다양 한 꽃들이 어울릴수록 꽃 시장은 더 풍부하고, 정서와 가치의 다양성도 더불어 피어날 것이다. 만약 꽃 시장이 장미꽃으로만 다 채워진다면 그 것은 장미 밭이지, 이미 꽃 시장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시장이란 상호간의 이해 속에서, 모자란 것을 서로 채우는 순기능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로서 온전할 때, 이웃과 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 역사와 민족 정체성 ’ 문제가 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동이를 살피는 뜻

서양 뿌리가 수메르라면, 동이는 동방의 뿌리다. 서양인들이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고 아세아인(古亞細亞人)들의 흔적을 꺼리는 것처럼, 중국역사에 동이는 숨기고 싶은 치부다. 왜냐하면 중국문명의 초석을 다진 것은 다름 아닌 ‘동이東夷’이기 때문이다. ‘중화제일中華第一’의 꿈을 다시 실현하려는 중국이. 영광!’을 되뇔수록, 동이는 그 양심을 자극하여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주나라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을 앞 세워 상고시대부터 역사왜곡을 줄기차게 해왔다. 이것이 ‘중화사관中華史觀’ 으로 굳어져, 지금도 변함이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동북공정(동북 변강사지 역사공정)’을 봐도. 만리장성 넘어 요하유역에서 황하문명보다 2000년 앞선 문명이 발견되었고. 그 중 세련된 ‘고조선(홍산문화)’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중화사관’의 고삐를 더욱 죄고 있다. 왜냐면, 중국역사에서 ‘만리장성 밖’은 자신들의 역사 주류 범주에 편입하거나,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변방 오랑케 땅일 뿐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큰 것이었다.

『주역周易에 동방東方은 오행 중 목(3,8)이며, 계절로는 봄을, 방위 신은 청룡을 상징하고. 동방은 해 뜨는 방향이자, 생명의 고향이다. 우리나라는 『주역』의 간방에 속하여 ‘만물은 간방艮方에서 시작하고, 간방에서 끝을 맺는다(始於艮終於艮)’ 했는데, 『후한서』에 ‘이는 뿌리다(夷者)’라 한 말은 그 울림이 크다.

갑골문과 금문 연구의 대가 낙 빈기賓基(1917-1994)는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역사는 한마디로 동이 역사다.” 라고 잘라 말했다. 남 조상을 자기들이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것은 서양이나 중국이나, 패권의 역사가 만든 허울이다.

문화는 수준이 높은 곳에서 하위 방향으로 전파되는 속성이 있으므로 요하문명의 실체를 그대로 인정할 경우, 중국의 위상은 추락하고 중화주의를 수정해야하는 난관에 봉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영토중심사관에 따라, 요하문명의 주체가 ‘동이족(고조선)’이 아닌 ‘화하족’ 역사라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 같이, 겨레의 역사가 송두리째 뽑히는 이 급박한 사태를 마주하고도 우리 정부는 안일하고, 식민사학을 이은 강단사학은 오히려 중국 역사공정을 돕는 실정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사정이 이러함을 깨달아, 우리의 안의 노예사관(사대주의, 중화사관, 식민사관)을 불식하여, 과거도 미래에도 동북아문명의 주체로서 자신감을 회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자 문화권 속의 동이

원래 ‘동이東夷’는 ‘동방의 어진 사람’의 뜻이었다. ‘이’는 지금도 이 이(), 저 이() 할 때 쓰고 있는 것과 같다.

헌데 중화사관과 식민사학의 폐해가 깊다보니, ‘동이’는 흔히 ‘동쪽 오랑케’라는 뜻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식민사관에 찌든 강단사학은 아직도 외국 유수대학의 논문에 ‘동이’를 ‘Eastern barbarian(동쪽 오랑케)’로 영역하여 학위를 받는다하니,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중심과 주변을 차별하는 화이관에 바탕을 둔 정치적 개념으로, 우리민족을 압박하고 폄하하는 논리로 누천년을 써온 개념이다.

그러나 근대석학 부 사년傅斯年(1896-1950)은 『이하동서설夷夏東西設』에서, 중국 고대는 ‘동쪽 평원지대의 동이東夷 계가 서쪽 고원지대의 하족夏族을 여러 면에서 문화 경제적으로 앞섰으며, 중화문명의 건설에 지대한 공이 있었으나, 그간 중국역사에서 이를 왜곡했음’을 지적했고.

『동북사강東北史綱』에서는 ‘상나라의 일어남은 동북(발해만)으로부터 왔고, 멸망하자 동북을 향해 떠나갔다. 상나라는 중국역사의 제1장이 되고 동북역사의 첫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부 사년의 제자이자 -미국 하버드대 중국 고고학 교수 장 광직張光直, 한국유학생들에게 ‘상나라는 여러분 조상이 세운 문명’ 임을 강조하고. 황하문명 단일 기원설을 부정하는 입장이라 했다.

나라 이전 고대 중국은 우리 겨레를 구려九黎, 구환九桓, 구족九族 등으로 불렀고. 또 『서경』 ‘우공편禹貢編’의 사이四夷1) , 전국시대 위나라 사관이-하나라에서 위나라 양왕讓王까지 역사를 다룬『죽서기년竹書紀年)』속에 구이九夷2) 가 보이는데. 이 때 사이, 구이는 활동 공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서경書痙』 〈주서周書-주관편周官篇 -‘성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는 구절에 ‘동이’가 보인다. 헌데 이 문장의 낌새가 이상하다. 여기 ‘숙신’은 ‘조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정벌한지 3년 후 죽자, 성왕成王의 숙부들이 상나라 유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섭정하던 주공이 토벌에 나서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하였다. 이는 동이계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 고조선 계 서국徐國 언왕偃王은 주나라와 패권을 다툴 만큼 위세가 있었으며, 36국의 조공 받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기를 느낀 주 5대 목왕穆王, 자기들이 손도 못된 천년왕국 초나라 문왕文王을 사주하여 ‘서국’을 치게 할 만큼, 치세가 녹녹치 않은 것이었다.

무왕이 상나라를 친 것이 BC 1046년 인데.

『환단고기』「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 하番韓世家下 아륵왕 5(BC 835)에 ‘주나라 이공(주공과 소공)이 사절을 보내 방물을 받쳤다(周二公 遣使獻方物)’했고.

「마한세가 하馬韓世家下」 사우왕 2(BC 753)에 ‘주나라 왕, 의구가 새해 축하 사절을 보냈다(周主 宜臼 遣使賀正)’고 했다.

이 기록은 주나라 연대나 사건과도 일치하고 있다. 특히 ‘번한세가 ’의, 대신 이공二公이 사절을 보낸 것은. 주나라 내란으로 ‘주려왕周厲王’이 피신하여, BC 841-828년 사이 14년간 공백을,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섭정한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나라가 성립된 지 200년이 지나도록,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축하사절을 보내는 기록이 있는데. 어떻게 고조선이, 동족을 치는 주나라를 축하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이것은 주 무왕이 민심을 이반한 상나라 주왕 멸한 뒤에도, 거듭되는 소요사태에 대하여 조선의 양해를 구걸한 전략적 문구라 보이는 것이다.

왜냐면, 나라 오 명제吳明濟가 지은 『조선세기鮮世紀』에 ‘단군은 구이들이 추대한 임금(九夷君之)’이라 했고, 『양서』에는 ‘동이의 나라 조선은 큰 나라다(東夷之國, 朝鮮爲大)’ 하였으며.

공자 7대 손 공빈(BC300년경)이 ‘(단군의)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거나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고. 군대는 비록 강했으나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단군조선은 구이를 거느린 대국이요, 군대는 사리에 어긋나면 움직이지 않는. 말하자면 오늘날의 유엔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주나라 성립 후 화이관華夷觀이 대두됨에 따라. 서쪽의 후진 주세력이 선진 동이東夷 ‘오랑케’로 몰아 기세를 꺾으려 한 의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중국문헌 사료에 의거한 ‘동이’의 뜻은, 중화사관이 얼마나 위장된 것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중국 고전 속에 드러나는 동이

한문의 초기 형태를 갖추고 있는,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 이 = 으로 이와 인()은 어진 것과 상통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나라가 동방에 위치하므로 ‘이인夷人’은 ‘인방人方’이라 불렀다는 예에서 보듯이, 동이는 ‘동방에 사는 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후한 허신許愼,『설문해자說文解字』‘이해설은 다음과 같다.

‘각 판본에는 이는 평이라 하고, 에서 쫒아 나왔고 궁에서 유래하였으니, 동방의 사람이다 했는데, 이는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개정한 바, 지금에 (와서)바로 잡는다(各本作平也 從大從弓 東方之人也 淺人所改耳今正 )

‘만물은 대개 땅에 있어서, 매우 순리를 따르는 성질이 있는데. 오직 동이만이 큰 것을 따르므로, 대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것은 오래사니, (동이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다. 생각하건데 하늘도, 땅도, 사람 또한 크고 존귀하니, (크고 존귀한) 는 사람의 형상을 본뜬 것이고, 의 옛글자 대를 따른 것이다(蓋在坤地 頗有順理之性, 惟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 而夷篆從大)’ 라고 했으며.

이어서 송나라, 범엽范曄(A.D. 398-445)이 지은『후한서』서문에

‘왕제가 말하기를 동방을 이()라 한다 하였다. 뿌리. 그 의미는 이가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하므로,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산출되는 것과 같다(後漢書東夷傳第七十五-王制云 東方曰夷 夷者也 言仁而好生 萬物地而出 (事見風俗通)

‘그러므로 () 천성이 부드러워 도로써 다스리기 쉽기에 군자국과 죽지 않는 나라에 이른 것이다. ‘이’는 9종이 있다.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 이다. 그런 까닭으로 공자도 구이에 살고 싶다했다(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夷有九種 畎夷 嵎夷 方夷 荒夷 伯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故孔子欲居九夷)’라 하고 있다.

『논어』-공야장편公冶長篇 자한지리子漢地理-에는.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서융, 남만, 북적 보다 다르다. 그 연유로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설문해자(풀이처럼)-구이에 살고 싶어 하셨다. 이유 있는 일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外 故 孔子曰 悼道不行 說文解字 欲居九夷 有以也)’했는데.

여기 『설문해자』 풀이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중국에는)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구이에서 살고 싶다 하시고. 바다에 뗏목을 띄워 타셨으니. 까닭이 있는 것이다(有君子不死之國 孔子曰 道不行 欲居九夷 乘柎浮於海 有以也)’는 대목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어 『산해경山海經(BC 770-221』을 살펴보자

『산해경』 「해내경」조항은 - ‘동해 안 쪽, 발해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 천독 이라한다.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서로 아낀다(海內經-東海地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 天毒 其人水居 人愛之)’ 했고

「해외동경」 조항에 - ‘군자의 나라가 북쪽에 있는데, 의관을 정제하고 검을 차며, 가축을 기르고, 큰 호랑이 두 마리를 옆에 두고 부리며, 그 곳 사람들은 양보하길 좋아해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 저녘에 진다(海外東經 -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爭 有薰花草 朝生夕死)’ 라 적고 있다.

전국시대 위나라 재상이었던, 공자 7대손 공빈孔斌(BC 300년경)이 쓴 『동이열전』을 보자. 우리고서 『환단고기』 내용과 연관 있어 주목할 대목이다.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었는데, 동이3) 라 하였다. -중략- 처음에 신통한 단군이 계셨는데, 마침내 구이의 추대에 응하시어 임금이 되셨다. 요임금 때와 같다(東方有古國 名曰東夷 -중략- 始有神人檀君 遂應九夷之推戴 而爲君與堯竝立)

순임금동이東夷에서 태어나,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지극한 정치를 하니, 모든 왕들보다 뛰어났다(虞舜生於東夷 而入中國爲天子 至治卓冠百王)

자부선인은 도통한 분으로, 다른 사람 지혜보다 뛰어나셨다. 황제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을 배워 염제 신농씨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紫府仙人有通之學 過人之智 皇帝受內皇文於文下 代炎帝而爲帝)4)

소련대련5) 은 상례를 잘 치루니 석달을 해태하지 않고, 삼년을 근심하여, 나의 선조 공자께서 그 효성을 칭찬하셨다(小連大連 善居喪 三月不解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하나라 도산 회의에 참석했을 때, (태자)부루가 친히 임하시니, 나라의 경계가 정하여졌다(夏禹塗山會 夫婁親而定國界) 6)

유위자하늘이 낸 성인으로 명성이 중국에 넘쳐흘렀고, 이윤은 그 문하에서 수업하여 은나라 현명한 재상이되었다(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동이)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았고, 군대가 비록 강했으나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풍속은 순후하며, 행인은 길을 서로 양보하고, 음식은 서로 권하며, 남녀는 따로 거처하여,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쪽 예의바른 군자의 나라라 할 만 하다(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同席 可謂東方儀之君子國也)

이러한 까닭에, 은나라 태사 * 기자는 주조정에 신하가 되지 않고, (고향)동이의 땅으로 피신하였다(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나의 선조 공자께서 동이에 살고 싶어 하셨으나, (그것을)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셨다(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 - 중략 -

작년에 동이사절의 입국 의례와 모습을 보니, 큰 나라 사람의 넓은 도량이 있었다(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 有大國人之襟度也) - 중략 -

그러므로 나 또한 느낀 바 있어, 사실대로 기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다(故余亦有感 而記實情以示後人焉)

여기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 기자가 주나라 신하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인데.

『사기』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 후朝鮮侯에 봉했다’했으나.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2백 년 앞선 공빈은 ‘기자는 주나라를 거부하고, 동이의 땅(하남성 상구현)으로, 스스로 갔다’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기자조선’의 허구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단군세기』는 ‘기자는 은이 멸망하자 BC 1120년 태항 산 서북에 살다가, 6년 후 현 하남 성 개봉남쪽으로 옮겨 일체-외부 인사를 사절했다(謝絶人事)’ 고 전한다. 지금 산동 성 ‘조현 읍 왕성두촌’에 있는 소박한 기자묘가 ‘기자조선의 허구’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중원문명을 개척한 동이의 활동

동이는 고래로부터 해안을 따라 한반도, 발해연안, 산동 반도, 양자강 남쪽까지 퍼져 살았다. 능 순성純聲은 ‘무릇 해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라 호칭 할 수 있다. 동방은 동이東夷 남방은 남이南夷라 불렀다.

이렇게 중원에 들어간 선주 동이는 산동반도 일대 북신문화(BC 5300-4500), 대문구문화 (BC4300-2600), 용산문화(BC 2800-2000)등을 일궜다.

산동 반도는 우이嵎夷 내이萊夷의 활동무대이자, 치우천왕의 청구국靑邱國이 비정된 곳이요, 소호 씨가 치세를 하던 곳이요, 공자의 고향 곡부가 있는 곳으로 고대 선진문화가 집적된 지역이었다. 그중 용산문화를 일으킨 동이계가 내륙(황하 중 상류)에 있던, 앙소문명(BC 5000-3000)을 정복함으로써 동이문화가 중국 내륙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 때 중국은 생산도구의 대대적 발전으로 농업혁신을 이루었고. 중국문명의 원형을 갖추었다.

BC 2600년경에 있었다는 탁록전쟁涿鹿戰爭은 용산문화 시기와 겹치는데, 치우의 치세治世와 거의 일치한다. 치우는 탁록전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구리머리, 철 이마)을 선보임으로써, 치우의 구려족九黎族이 중원에 청동기 문명을 이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중원의 청동기는, 상나라가 하나라를 정복하면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여, 찬란한 고대 중국문명의 꽃을 피웠다.

실재 중국학계도 자기네 청동기는 ‘자생이 아니라, 발해만 북부(고조선)에서 시작하여 중원에 들어 온 것’을 인정하고 있다. (홍산-하가점하층 문화)7)

그런데 『사기』 첫 장은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이 쓸모없자,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蚩尤作亂 不用帝命 …… 遂擒殺蚩尤)로 시작하고 있다.

중국 25사 첫손가락인『사기』첫머리를 ‘동이족 천자를 죽이는 전쟁사’로 시작하는 이 문장이야말로, 역사 가필의 대표적 사례이자, 패권역사의 표징이다.

허나 이 문장과는 달리. 민담, 설화 속 치우천황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우리 기록 또한 생생하여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1970년대 산동성 서부 ‘치우 총’을 발굴한 바, 용산문명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기 주석서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공안국 왈, 구려임금 칭호는 ‘치우’다(孔安國曰 九黎君號蚩尤)”라 했고, 『사기집해史記集解』는 “응소 왈, ‘치우’는 옛 천자의 칭호다(應召曰, 蚩尤古天子之號)”라고 했다.

여기서 『사기』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는 기록은 ‘사기주석서’로 이름난 『사기집해』 ‘응소 왈, 치우는 옛 천자의 호칭이다(應召曰, 蚩尤古天子之號)’라고 한 이 대목에서 다시 뒤집힌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천자天子는 둘이 될 수 없고,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행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우가 이미 천자로 등극하여 호령하고 있었다면, 어찌 황제가 명을 내릴 수 있는가?

이 문장은 ‘신하인 황제가 명을 내렸는데, 먹히지 않자 천자를 잡아 죽였다’는 뜻이 되니, 말이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황제에 ‘제’를 붙이고, 치우는 그냥 ‘치우蚩尤’라 한 것은 춘추필법- 존화양이尊華攘夷 8) 의 전형적인 것이다.

더구나 치우의 문명이 훨씬 선진적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무기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인 이다. 진시황도, 한 무제도 ‘전쟁 신(兵神)’으로 ‘치우’를 모시고, 제를 올렸다는 기록은 ‘진실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국 삼황-오제 설은 5-6가지가 넘는다. 흔히 통용되는 두 사료 중 『상서대전』 「오제五帝」는-황제, 전욱, , , 순 이고, 『대대레기』 「오제五帝」는-태호, 염제, 황제, 소호, 전욱으로 되어 있다.

이를 잘 살피면 『상서대전』에는 황제만 황이라 하지 않고, 를 붙여, ‘임금 중의 임금’ 이라 표기하는 것을 볼 수 있고.『대대례기』는 삼황의 신농씨까지 끌어드려 오제五帝에 넣고, 유독 염」 황」로, 를 붙여, 어느 사서에서나 황제로 표기하게 하고, 자기들은 늘 염황자손炎黃子孫 이라 강조해온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치우천왕(BCE2707-2598)이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청구국’을 세우고, 탁록 전에서- 황제를 신하로 삼았다고 했다.

또 『산해경』 「대황북경大荒北經」 에 곽박(AD256-324)이 주석하기를, ‘치우가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토벌하였다(郭璞云, 蚩尤作兵伐黃帝)’고 하였다. 여기서 ‘벌은 벌초할 때 ’벌‘로 쳐서 흔적을 없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곽박의 『산해경』 주와 『환단고기』와 『사기집해』가 일맥상통함으로, 우리는 사마천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각을 달리하여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앞서 고대에는 천자만이 하늘에 제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했다. 이 제천 권한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를 가늠하게 된다. 나라가 제례에 그렇게 목을 맨 것도, 제례가 곧 권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단군은 탱그리Tengri에서 온 말이다. 탱그리 사상은 북방 초원문화의 산물로, 하느님을 경배하고,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사상이다. 탱그리Tengri(몽골)-탕그리tangri(중앙아시아)-탕그라Tangra(동유럽)-티엔즈Tianzi(중국)-탕구르Tangur(만주,퉁구스)-단군Dangun(한국)-딘그르Dingr(수메르) 등으로 발음을 달리 할 뿐, 의미는 똑 같다. 이를 보면 알타이 계 언어 군에 속하는 민족들이 아시아에서 동서 초원을 관통하여 북, 동 유럽에 걸친 거대한 단일 문화권을, 고대에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데 BC 3500년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틀을 갖춘 것으로 보는 총(-무덤), (-신전), (-제단)이 발견된 곳은 요하유역 ‘홍산문화’가 동북아에서 유일하며. 고대 제천행사를 할 수 있는 제단 설치는 세계4대문명 발상지 보다 앞선다.

이렇게 고도의 문명을 소유한 나라는 동북아에서 ‘고조선’ 외엔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 그래서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5500년 경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단이 발견된 때는 단군시대보다 앞선 배달 환웅 시대이므로, 따라서『사기』에 등장하는 치우는 당연히 그냥 치우가 아니라,『사기집해』‘응소’가 말한 것처럼「치우천자蚩尤天子」가 되는 것이다.

 

겨레의 시원과 줄기

상고시대 우리겨레는 맥족貊族, 예족濊族, 한족韓族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조이鳥夷가 맥을 낳고→ 맥이 예를 낳고→ 예가 한을 낳았다 했다.

중국학자 정현鄭玄은 ‘조이鳥夷는 동북백성이다’ 했는데. 여기 조이가 우리 역사의 최초 동이다. 역사학자 심 백강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기』 「오제본기」 ‘순임금 조’에 나오는 ‘조이’가 태호, 치우 시대 최초 동이요, 『상서』 요임금 때 ‘우이嵎夷’는 고조선 시대 동이다. ” 즉 조이→ 우이→ 사이→동이→구이 등으로 시대에 따라 표현을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이가 (치우)환웅 시대라 하고, 조이가 맥을 낳았다 하면. 조이에서 맥족貊族을 낳는 과정이, 단군조선 출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정치적 공동체가 성립되는 과정으로 본 다면, 새 토템 족 + 곰 토템 족= 단군조선으로 볼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것을 다시 민족명으로 정리하면, 구려九黎(치우-조이)→ 구환九桓(단군-우이)→ 구이九夷(단군-동이)→구맥九貊(단군-동이)이다.

그러므로 동이는 공통의 문화 동질성을 표현하는 범칭凡稱이요, 예맥(濊貊) 등은 혈연적 동질성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정의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맥족의 원류는 어딜까? 『산해경』 백민白民, 『사기』(오제본기) 북발北發, 『관자』 발인發人이라 표기되었는데. 이 백민, 북발, 발인이 → 맥, 로 불린 후 다시 여러분파로 나뉜다 했다.

『산해경』 「해내서경」 -‘맥국이 한수 동북방에 있는데 연나라와 가깝다(貊國在漢水東北 地近於燕)’ 했다. 곽박 주석은 ‘지금 부여국은 예맥의 옛 땅이다. 장성북쪽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今夫餘國卽濊貊故地 在長城北 去玄菟千里)’ 했다.

또 중국학자 능 순성純聲은 ‘무릇 해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라 할 수 있다’했고. 정현鄭玄은 『정지鄭誌』에 ‘구맥은 곧 구이다.(九貊 卽 九夷也)’ 라 했다.

여기서 이= - 구이九夷=구맥九貊라는 구도로 단순화 할 수 있다.

이어서 문 숭일文崇一은 『예맥민족과 그 문화濊貊民族及其文化』에서, 예맥민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강대한민족이었다. 한나라 초기에 중국의 북쪽지역(섬서, 산서, 하북성 북쪽)과 황해 발해만 연안(조선반도 포괄)에 모두 그들의 족적이 있었다. 예맥濊貊은 서한西漢 이전의 시기에 조이鳥夷민족의 한 갈래로서 소호씨 족에 속해 있었다. 순임금, 은나라와 혈연적으로 매우 가깝고, 동이의 여러 민족과도 혈연관계에 있었다. 예맥은 역사가 시작되기의 흑도문화黑陶文化 시기로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 까지 일관된 맥을 유지 발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렇게 유구한 종족 명칭은 어디서 왔을까?

맥은 백, 또는 백이었는데, 중국인들이 동물 치변을 더하여 ‘오랑케 맥(, )으로 변질시켰고. 는 원래 ’세월‘의 세였는데 물수, 벼 화를 더하여 ‘더럽다’는 뜻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원래 맥은 ‘밝(), 는 ‘새(아침), (나라), 은 ‘환()하다’는 뜻의 한문 표기로. 환하고, 밝은 태양을 상징하는 고유어에서 민족 명칭이 유래한 것이므로, 일찍이 최 남선은 「밝」 사상을 주창 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밝달’의 큰 뜻을 품을 때, 반도사관을 떨치고 대륙을 아우른 큰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보는 동이

근대 중국역사학자 유절은 『중국고대종족이식사론中國古代宗族移植史論』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동이족이나 화하족은 맥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夷也華也 莫不出於貊)

날선 칼과 같은 이 말은 마치 선객禪客의 화두처럼 중화사상, 식민사관, 그리고 사대주의를 단 칼에 베고 있다.

이 말은 ‘동북아시아 모든 민족은 맥족의 후예다.’는 것이다. 바로 말하면, ‘맥족이 본래 동이족이요, 동이족에서 화이족이 갈려 나갔다.’ 가 될 것이다.

『아시아 이상주의』9) 저자 이 상범은 더 간략하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낳았다.

그 단서가 『산해경』 「해내경」조에 ‘동해안 발해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 천독 이라한다(海內經-東海地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 天毒).’라는 대목에 있다.

여기가 맥족의 시원 지, 지금 들 끌고 있는 요하유역- 지금 세계 고고학계가 놀라고 있는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권역이요, 고조선의 강토다. 이 곳은 황화문명보다 2000년 이상 빠른 지역이며, 문화의 성숙도에 있어서도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문명인 것이다.

여기는 북방 천손강림 사상과 남방 난생설화가 겹치는 유일한 곳이자. 거석문화(고인돌), 채도문화, 빗살무늬토기, 세석기 제문화가 겹치고 발원하는 세계 하나 밖에 없는 곳이다. 이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민족의 역량 결집의 파급은 거셀 것이다. 중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지금까지의 ‘중화사관’에 따라 주장해온 모든 이론들을 일대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난관에 부닥치자. 이제 ‘동이’는 한국과 중국의 공동조상이다.’ 는 물 타기 론까지 들고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면 그들이 중화사관을 포기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물 타기 논조 속에는 “한국도 황제 자손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요하 적봉시 홍산유적 신전()에서 여신상과 함께 곰 아래 턱 뼈와, 구은 흙으로 된 곰 발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사서에 황제를 일명 유웅씨(有熊氏)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한국이 스스로 고조선을 부정해왔듯이, 요하문명의 주체는 황제라 결론을 짓고 세계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일까? 아니다. 우리는 신화로 알고 있던 단군의 실재를 앞서 이미 보았으나, 『단군세기』에 더 자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 단군왕검은 아버지는 단웅(환웅)이요, 어머니는 웅씨 왕 따님이시다. 신묘년(BCE 2370) 52일 인시((03-04)에 태어나시니, 신인의 덕이 있어 모두 경외하였다. 14세 되던 해 웅씨 왕이 소식을 듣고, 대읍국(大邑國) 비왕(裨王)에 천거하여, 국사를 맡았다. 무진년 (BCE 2333-38) 단국檀國으로 돌아와, 구환족九桓族을 하나로 합쳐 나라를 여시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비왕으로 24, 93년간 제위(帝位)에 계셨다. 서기전 2241 315일 단군왕검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 십리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고 했다.

지금도 처자들이 매는 댕기는 단군이 돌아 가셨을 때, 흰 천으로 머리 뒤에 맨 ‘조기弔旗에서 유래한 것이다. 음력 315일은 지금도 민가에서 어천절御天節로 기념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단군이 아홉 나라를 통솔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조선ㆍ시라(실라)ㆍ고례(고구려)ㆍ북옥저ㆍ남옥저ㆍ북부여ㆍ남부여ㆍ예ㆍ맥 모두 단군이 다스렸다.

또 황제의 족보에 대하여 「삼한관경본기」는 이렇게 전한다.웅씨 족에서 갈려나간 후손에 소전(少典) 있다. 안 부련 환웅(8) 명을 받고, 강수姜水10) 에서 군병을 감독하였다.

그 맏아들이 석년石年(염제 신농)이고, 둘째가 욱인데 그 후손에 공손公孫이 있다. 공손은 가축을 잘못 다룬 죄11) 로 헌구軒丘에 귀양 가서 살았고 헌원軒轅은 그의 후손이다.” 했다.

그런데 소전은 또 소호와 함께 고시 씨高矢氏의 방계자손이다. 지금도 농촌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고시례! 하면서 예를 갖추는 겨레의 선조 그 고시 씨다. 그렇다면 오히려 황제는 동이족에서 갈려 나간 것이 된다.

다음을 보면 황제의 ‘유웅국’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지지」에서 말하기를 탁록은 본래 팽성이라 하는데, 황제가 처음 도읍으로 삼았다가 유웅有熊으로 천도하였다(與地志云 涿鹿本名彭城, 黃帝初都, 遷有熊也)’ 했고

이어서 『사기집해』 「오제본기」 - ‘유웅有熊은 현재 하남성 신정현이다. 유웅이라는 지명에서 나라를 받고, 헌원軒轅의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웅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고, 헌원으로써 호를 삼았다(有熊今河南新鄭是也, 受國於有熊, 居軒轅之丘, 故國以爲名, 又以爲號)’ 라 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황제가 처음 나라를 연 곳이 팽성(탁록)이었고, ‘유웅’으로 천도함으로 써 ‘유웅국’은 황제가 살던 땅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요하문명 여신 전에서 발견된 곰 턱뼈와 유웅국有熊國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더구나 요하유역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 토기, 비파형 청동검, 적석총, 고인돌, 청동단추 등은 황하문명권과 확연히 대별되며, 또 고래로부터 이 지역을 다스리던 부여, 고구려, 여진족 등 고조선 후예들의 활동이 엄연히 기록으로 남아 있고, 유물 또한 생생하므로. 요하문명의 주체는 밝달 한 겨레 임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요하문명의 주체가 황제로 자리 메김 되면 고조선은 영영 사라지고, 고조선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뿌리 없는 유랑객이 되고 만다. 참으로 급박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시민 사학이 나설 뿐. 우리 정부는 소극적이고, 강단사학은 사명을 잊은 지오래요, 대중은 식민사학의 폐해 속을 헤맨다.

 

한사군 대동강 유역 설은 폐기될 때

여기 주목할 역사학자가 있다. 최근 방대한 청나라 정사正史인 『사고전서四庫全書』속 사료를 분석하여 ‘낙랑군’ 위치가 정확히 ‘현재 북경 아래 –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徐水縣 수성진遂城鎭’ 임을 고증함으로써, 식민사학의 ‘대동강 유역 낙랑군 설’ 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심 백강 이다.

물론 ‘요서 낙랑군설’은 신 채호, 정 인보, 윤 내현, 북한 리 지린, 러시아 부찐 등 석학들의 연구로, 그간 꾸준히 제기돼왔다.

심 백강은 중국 총사인『사고전서』79천권을 고증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고조선 영역이 선학들의 기존 입장보다 훨씬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 북경 중원의 핵심에 있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료를 찾아 증험한 쾌거다.

한편 중국학자 여사면思勉(1884-1957)도 『중국민족사』에서 ‘고대조선(古朝鮮)은 결코 한반도에 있을 수 없었다.’ 고 했다.

또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는 『산해경』 - ‘동해 안 쪽, 발해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 천독 이라한다 (海內經-東海地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라 한 대목에,

곽박은 “조선은 지금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 今浪郡也 )” 라고 주를 달았다. 이 한마디만 챙겼어도 사대주의자나, 식민사학자들이 ‘낙랑은 평양에 있었다’는 망발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곽박이 누군가. 곽박(A.D. 256-324)은 동진東晋 사람이다. 동진은 본래. , , 오 삼국 전쟁을 마무리한 진나라가 39년 만에 북방민족에게 망하고, 그 자리에 소위 516국이 들어서자. 남쪽으로 쫓겨 와 세운 한족 정권이다. 그러므로 곽박은 고조선에 결코 호의적일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고조선이 망한지 400년이 넘었던 때 “ 조선은 지금 낙랑군이다.” 주를 낸 것이다.

곽박이 ‘낙랑군은 지금 평양이 아니라, 발해모퉁이에 있었다.’고 말하는. 간단한 이 사료를-조선의 그 수많은 사대부들이 못 봤을 리 없고, 식민사학자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식인들의 사명과, 사물에 관한 통찰과, 역사의식이 없는 단순 지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주체 없는 사대주의에 빠진 결과. 조선왕조는 민족 상고사上古史 수거령을 내려 폐기하고(세조, 예조, 성종) 그 수많은 조선의 천재들, 선비와 사대부들이, 제 민족 역사하나 갈무리 못했다는 것은 피할 길 없는 우수憂愁.

 

실담어悉曇語로 살핀 동이

‘동이족’의 산스크리트 어는 Tunga-i 이고. 영어 해역은 great, high, lofty, excellent, eminent, prominent trabe, korean ancient race .(강 상원12) 조선고어 실담어 주석사전 참고)

실담Siddham어는 범어梵語(Sanscrit) 와 같은 뜻으로 ‘완성된 말’ ‘깨끗한 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고대 ** 중천축국中天竺國 을 중심으로 사용하던 상형문자象形文字(신수대장경54悉曇字記-智廣禪師-)이다.

산스크리트 옥스퍼드 사전에 의하면, Tunga-i (동이족)’는 (천문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빼어난 사람, 또는 종족을 뜻한다. Tung-i의 ‘뚱tung’은 '뚱가랏 ㅅ다'같이 천지만상을 통철한, 우수한, 걸출한 뜻이다. 『주역』 「계사」 ‘위로는 천문을 통하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살펴 안다(上通天文, 下察地理)’ 는 지혜를 일컫는다.

Tung'만상의 이치와 대간을 살펴 꿰뚫는 것'을 말하는 통큰 민족인 것이다.

여기에 ‘이i(그이(), 저이(), (), 무리)가 붙은 합성어 다.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이 말하는 =()으로, ‘이’가 곧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신라 눌지왕 때, 재상 ‘박 제상’이 지었다는『부도지符都誌』에는 우리민족이 12천 년 전 파미르고원에서 동방으로 진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간빙기가 시작되면서 온 지구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사람들이 높은 고원지대로 피신하게 된 까닭으로-오늘날 히말라야, 파미르 고원지대의 고산족들이 잘 대변하고 있는데.

언어학자 강 상원은 당시 히말라야 북쪽부터 파미르고원 중앙 분지에는 파내유지국波奈之國 이 있었고, 그 곳에 ‘마고(Mago)성’이 있었다했다. 그 중심을 꾸루(kuru ; 구리, 구려, 고려) 또는 꿀리아(kuiya ; Korea)라 했으며, 파내유지국에 있는 동산을 으드은(Edhin, ) 동산이라 했는데, 에덴Eden은 동산이라는 뜻으로 Edhin에서 파생된 것이라 했다.

북방 사北方史를 연구하고 있는 김 정민에 의하면, 티베트 고산지대 서쪽 카자흐스탄 옛 수도 알마티(Almaty)는 알마+아타(사과Alma+할아버지Ata)에서 온 것으로, 사과 원산지라는 뜻이라 한다. 실제 식물도감 사과 원산지도 중앙아시아다.

더불어 현 카자흐스탄 중심 부족인 케레이(겨레족) 역사는 ‘자기들은 파미르고원에서 출발하여 중원과 만주, 몽골 초원(오르혼)에 나라를 세우고 살다, 9-12세기 징기스칸이 서진할 때 현재 지역으로 왔다고 기록했으며, 헝가리와 불가리아도 자기들의 시원을 파미르고원 서쪽 발(Balh)이라는 곳이라 했고, 투르크(터기) 기원신화 ‘아쉬나 전설’ 무대는 동트르키스탄(신장 위그루 자치주)의 투르판(Turphan)이라 했고, 『환단고기』가 전하는 환인의 무대도 천산天山이다.

대홍수 후, 이렇게 우랄-알타이 제 민족들의 처녀지 파미르고원 중심에 ‘마고성’이 있었다는 것이니. ‘마고성’의 ‘마고Mago’는 ‘베 짜는 할매(麻姑)’라는 뜻이다. 이 ‘마고’가, 마그(사산조)-마기(메디아)-마꼬쉬(동유럽)-웨가(아랍)-베가(유럽) 등으로 음운변화를 일으키며, 그 신화가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지리산 ‘마고 할매’ 전설이 있고, 아기를 점주한다는 ‘삼신 할매’가 마고다. 유라시아 전역에 퍼진 마고도, 출산과 직물을 담당하는 여신이다.

마고Mago의 명칭은 당시 북극성 ‘직녀성織女星’과 관련이 깊다. 서양 천문학에서는 거문고자리 가장 밝은 알파별을 ‘베가Vega’라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도 ‘Vega’는 ‘베 짜는 전문가’라는 의미다.

12000년 전에는 북극에 '베가 별'이 있었기 때문에 북극성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북극성은 작은곰자리 알파별 '폴라리스Polaris'. 알파별은 각 별자리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북극별이 바뀌는 것은, 달과 태양의 중력에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지구가 자전 할 때, 자전축이 흔들리는 '세차운동' 현상 때문이다. 세차운동 주기는 25800년 인데, 이는 황도 12궁 별자리를 2150년 주기로 모두 돌아, 제자리로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12-3천 년경 후에 북극 ‘직녀성’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고. 지금 ‘폴라리스’는 25800년 후에야 다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문학의 선두 동이

‘마고 성’이 별자리에서 온 이름이라면, 12000년 전 당시 천문을 관측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고서 『환단고기』에도 색불루 단군 을해년(BC 1066)에 천문을 관측하는 감성監星을 두었다 했고, 조선 태조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次分野之圖 (AD 1395)’는 고구려 천문도 탁본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고구려 천문도 제작 시기로 보면-세계에서 가장 앞선다.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 송나라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AD1247)’ 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뒤지나, 미학적 가치 면에서 앞 권인 것을 감안 할 때, 산스크리트 영어사전 풀이는 숙고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천문학의 선두 민족인 것을 현대 천체물리학자, 고등과학원 박 창범 이 밝혔는데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동아시아 일식도』에서 우리 동이족의 천문관측 역사가 5000년 이라 했다.

그는 대동강 유역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와 평안남도 증단 군 10호 고인돌 80여개 별자리를 측정한 결과, BC 2800-220 년으로 밝혀짐으로써,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토지경계비에 새긴 기록 BC 1200년보다. 무려 1600년이 앞선 기록임을 밝힌 것이다.

아울러 박 창범은 『환단고기』와 『삼국사기』 천문기록도 검증했다. 소위 「단군세기」 13세 흘달(屹達)단군 무진(戊辰) 50(BC 1733)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 천문기록이다. 이것은 다섯별이 ‘루’ 라는 별자리 중심으로 나란히 나타난 현상을 기록한 것인데, 그 순서는 화성- 수성-토성-목성-금성 순이다.

이 현상이 일어 난시기는 BC 1734712일이다. 이 날은 화성 다음에 달까지 등장하여,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에 나타난 하늘은 장관이었다. 이것은 13세 단군 기록과 1년 오차가 나고 있는데, 이 오차는 태양력 중심의 현대 천문학에서는 소수점을 한 참 찍어야 할 만큼 「단군세기」의 기록은 정확한 것이라 하였다.

또『삼국사기』일식 및 천문현상을 검토한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고구려는 바이칼 동남쪽 몽골지역이었고, 백제는 발해 연안이었고, 상고上古신라는 양자강 유역에서- 하대(下代)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있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고대 천문대는 왕성(王城-수도)에 설치되는 것이므로. 우리민족이 대륙에 있다가 한반도로 들어 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소위 재야사학자들이 공공연히 주장해온 바를, 현대 천체물리학이 검증한 것이라서. 사적 연구에 더 촉매재가 될 것이다.

특히 별자리로 검증된 발해연안의 백제 위치는, 청나라 정사正史인『흠정만주원류고』백제 편 기록이 증명하고 있어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 백제는 발해 연안 진평(晉平)에 치소治所가 있었다.’고 정확히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흠정欽定은 ‘왕이 명을 내려 편찬하고, 감수까지 했다’는 뜻이다.

어째든 현대 천체물리학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화 되어 있어서, 과거 수 만년부터 미래 천문 현상까지 모두 검증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역사연구 발전에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하늘은 속임이 없으므로, 어느 민족이 역사를 왜곡했는지 그 실체가 밝혀질 것이다.

고대 천문가들은 제사장들이었다. 제정일치시대의 제사장들은 천문天文을 이해한 도통한 사람이 아니면, 통치권을 부여받을 수 없었다. 천자天子 개념 뿐 아니라, 방위, 가축 이동, 작물재배, 계절변화 등등 생명유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따라서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천문관찰과 해독은 필수 불가결한 덕목이었다.

지금처럼 망원경이 없던 때, 그들은 여러 기구를 통하여 별자리를 관찰했는데, , , 등은 천문기구나 별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그 중 하나가 커다란 동이에 물을 채우고, 씨줄 날줄을 표시하는 라선羅線을 올려놓고 별자리를 관측하였다. 따라서 ‘동이東夷’가 있는 곳에는 ‘()동이’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 도기 기술은 오늘 날 첨단기술과 같은 것이었는데, 제주, 극동, 발해연안 등에서 1만 년 전 토기가 발굴되고, 만주 요하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 BCE(the before of common Era) 6000년 밑이 편편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특히 밑이 V자 형 빗살무늬토기는 BCE 5000년경 한반도 중부에서 태어나, 북방루트를 타고 북 유럽까지 퍼져나갔다. 따라서 기존 빗살무늬토기 서방기원설은 빛을 잃게 되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토기 출현시기가 BCE 5000년경 이므로, 동아시아의 토기는 놀랄 만큼 빠른 것이다.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마지막 빙하기에 한반도와 그 주변은 빙하의 영향이 비교적 적었다하고, ‘지금부터 8000년 전, 고대 황해는 지금보다 해수면이 7.3m 낮아서, 그 아래 펄 층에는 고대 비밀을 풀 수 있는 유물이 다량 묻혔을 것’으로 추증하고 있다.

또한 내몽고 지역에서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는 흑피 옥토템 유물(탄소측정연대 14,000년±600), 실담문자와 갑골문이 또렷이 새겨있는 것으로 미루어, ‘동이족Tunga-i’은 문자(), 역사(), 철학()을 간직한 빼어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카 족과 동이

스키타이Scythaian는 그리스 역사가 헤르도토스가 BC 5세기 흑해지방을 방문하고, 그 곳 철기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붙인 명칭이다. 스키타이는 지역에 따라 종족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보통 히타이트 족이 철기를 발명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으나, 철기의 발상지는 아시아 초원지대로 좁혀지고 있다. 이들은 유목민으로 북방 초원지대를 이동하면서, 문명의 성쇠를 거듭하였다.

이 스키타이를 페르시아는 사카Saka라 불렀다. 사카는 알타이- 투르크 어로 ‘삭Cak’이다. 삭의 발상지는 중앙아시아 천산산맥을 따라 드넓은 초원 산악 분지이다.

Cak의 중국 표기는 ‘새(Sai)’ 인데, 고대는 석Sek으로 읽었다 했다. 따라서 사카(인도)-(중앙아시아)-(-한국)-(중국)-스키프(러시아)-스키타이(영국) 등으로 불렸다.

부처의 종족을 사카Saka 족이라 하는데, 이는 철기문명을 소유한 부족이라는 뜻이다. 부처의 사카족이 언제 북인도로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부처가 활동하던 기원전 5-4세기인데. 인도에 철기문명을 가지고 온 아리안 족의 베다Veda 시대(BC 1500-500) 후기이다. 따라서 부처의 조상들은 기원전 5세기 이전 인도에 왔을 것이다.

한편,『흠정만주원류고』부여 편에 ‘부여는 색리索離에서 나왔다.’ 했으며, 또 ‘색의 훈이 탁과 같으므로 간혹 사서에서 탁()으로 기록했다.’ 고 했다.

그런데 고조선이 한나라 침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북부여 고두막한이 고조선을 이어 위기를 수습함으로써, 한나라가 요동을 넘지 못하게 된다. 이 고두막한이 온 곳이 탁리국槖離國, 곧 색리국索離國 이다. 탁리국은 서 요하 몽골지역에 있던 조선연방국이었다. 그래서 몽고인들은 고대 우리를 색리국이라고 한 것이다.

옥편에는 색의 다른 음으로 ‘동아줄 삭’으로도 읽는데, 중앙아시아 ‘삭(Cak)’ 과 발음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가야가 나왔다. 그런데 고구려 개마무사 철갑옷과 카자흐스탄 무사의 철갑옷이 너무 똑 같을 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핵심 부족중의 하나가 케레이 족인데 ‘케레이’는 ‘겨레’ 와 같은 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발해가 망하고, 만주에서 발해유민들이 ‘요나라’와 벌인 국권회복 투쟁기록과 똑 같은 역사기록13) 을 공유하고 있다. 하여튼 동이족과 삭Cak 족은 어떤 연원이 있을 것으로 유추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조선의 철기 생산은 BC 1200 14) 이전으로, 인도 아리안 족 철기문명 BC1200 년보다 앞서거나 같고. 중국은 BC 8~6 세기다.

고조선은 BC 3세기 물고기 비늘 철갑옷(鱗甲)15) 을 생산하고 있는 데. 고구려의 개마무사기병 철갑옷은 고조선 없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 성이 고조선의 치성을 이었듯이, 고구려 철갑옷은 고조선을 그대로 이은 것이다.

또 고구려를 발해가 이었으니, 발해 무사도 고구려 무사와 같은 편재로 짜였을 것이며, 카자흐스탄 ‘케레이 족’의 ‘요나라’ 항전 기록으로 미루어. 케레이 족은 발해의 일파임이 확연해지므로. 따라서 카자흐스탄 무사 철갑옷과 고구려 무사 갑옷이 같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겨레역사와 강역은 북방을 아우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할 때, 만주 벌판을 내달리던 그 기상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 대표적 스키타이는 흉노와 돌궐로 알려져 있는데. 흉노는 BC 2세기, 돌궐은 6세기 중반에 각각 북방 초원을 장악하고 대 제국을 건설하였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3세 가륵 단군 재위 6년 되던 해(BC 2182) 약수弱水 지방(현 감숙성)에 유배시켰던 열양지방관 삭정을 그 땅 봉하니, 흉노匈奴의 시조가 되었다 했다.

흉노는 중국이 폄하하기 위해 붙인 것이고, 원래는 ‘향기로 울 훈’의 훈족이다. 이 훈족이 한 나라에 밀려 서진西進하면서, 로마제국의 멸망 등 유럽에 대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신라 황금왕조 김씨가, 훈족 좌현 왕(휴도休屠)의 왕자 김 일제 자손임이 근자에 잘 알려졌다. 훈족의 대 선우 아래 좌, 우현 왕을 두는 제도는, 고조선에서 국가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삼분관경제도(삼한, 삼조선 등)와 같은 것이다.

또 신라 태자(마의태자로 추측) 자손들이, 겨레의 일파인 여진족(만주족)을 규합하여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래서 금나라, 후금의 청나라 황실의 성씨는 모두 신라 김씨-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16) . 애신은 ‘신라를 사사모함’으로 풀기도 하지만, 만주어로 ‘아이 신(aixin)’이며 금()을 뜻하고, 각라는 신라를 자각 함이다.

또 야금술이 뛰어난 돌궐족은 553년 북부여 시조 고두막한의 탁리국 자리에 있던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을 장악한 뒤, 오스만 투루크 제국을 세웠는데-그 후예가 지금의 터키다.

더구나 스키타이Scythian는 고대 페르시아어 스쿠타Skuta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영어 궁수(Shooter)의 뜻이니, 동이東夷 '활잘 쏘는 민족'과 어원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제 족이 각 문명권역에서, 각기 분파하여 거주지 환경과 적응하면서 오늘의 국가를 형성됐음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맺는 말

앞서 살폈듯이. 이제 역사학은 천문학, 신화 해석학, 유전학 등의 발전으로, 기존 제 이론을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천문학과 유전자 추적을 통하여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새로운 시도는 많은 관심거리다.

우리 상고사를 밝혀주는 사서史書 『부도지』와 『환단고기』가 민족의 길라잡이가 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도지에 등장하는 마고 성 이야기는, 대홍수가 실재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파미르고원 마고 성 시대 여러 종족이 섞여 살면서 많은 혼혈이 있었다는 것 또한, 유라시아 동서 대륙에 마고전설이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써 유증할 수 있었다.

또한 ‘단군 신화’와 북방 부리야트 족 ‘게세르 신화’는 그 구조가 일치하는데, 이 부리야트 족이 환국시대 12연방의 하나인 비리국(卑離國)으로도 추증되고 있는 바. 이는 북방 초원문화가 공유하는 세계관을 탱그리 사상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바닷길 또한 인류에게는 피할 길 없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고대에는 바닷길이 지금의 하늘 길과 같았으므로, 바닷길을 따라 문명의 전파는 가속화 되었을 것이고. 동서로 광대하게 펼쳐진 초원길을 따라 청동기와 철기로 대별되는 문명의 출현은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이합집산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밝달 한겨레의 기반은, 발해 연안의 해양 문화와 북방 초원 문화 요소가 결집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인류이상의 꿈을 실은 고조선(古朝鮮)을 탄생시킨 것이다.

세계사에서 각 나라 건국이념을 살펴 볼 때. ‘홍익인간’의 박애사상과 ‘재세이화(在世)의 법치法治를 구현할 원대한 우주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개천()한 나라는, 고대에도 현대에도 없다.

이것은 앞서 살핀 것처럼 환국시대 이미 인류공통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경험을 DNA 속에 소중히 간직한 겨레의 사명이 만든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역사학자 ‘부찐’도 ‘동북아에서 고조선을 제외하면, 동북역사는 성립될 수 없다. 다른 나라는 없는 역사도 만드는데, 한국은 실존한 고조선을 부정하는 이상한 나라이다.’ 라 호소한다.

고조선이 없으면, 세계 4대 문명축이 허물어지고, 인류의 이상을 실현할 홍익인간 사상은 영원히 잠잘 수밖에 없었다는 이 절규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일본의 한 양심 있는 역사학자는 “한국에는 미안하지만 일본은 역사 왜곡을 통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고, 그 자긍심으로 세계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고백 하였다.

왜 남들은 없는 역사도 만들까?

역사는 혼의 축약체이기 때문이다. 역사야말로 수많은 정보가 녹아있는 바다와 같은 것이다. ‘정보를 지배하는 자, 곧 세계를 지배한다.’ 는 말처럼. 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집성하느냐에 따라 민족의 운명은 갈리는 것이다. 대국일수록 역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 없는 민족은 족보가 없는 것과 같다. 뿌리 없는 나무가 바람을 타듯이, 우리 겨레는 역사를 잃은 후 환란이 거듭된 것이다.

제국주의는 민족 단결을 방해했다. 역사조작, 종교, 무력, 경제 수단을 동원하여 교묘히 민족 성원의 심성을 파고들어, 모래처럼 흩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흔히 우리 민족을 빗대 모래 같다 하고, 일본은 진흙에다 비유한다. 이 말은 우리가 역사 중심에서 멀어져 분열을 가속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 없는 민족은 미래도 없다.” 단재 신채호가 사무쳐 외친 말이다.

부처는 무지가 죄를 낳는다 했다. 물론 부처는 근원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사 민족간 투쟁이 멈추지 않는 한, 자신을 지키는 방편으로서도 역사인식은 필요한 것이다.

보석은 깊이 뭍일수록 더 빛나듯이, 겨레 역사는 질곡 속에서 움을 트고. 겨레가 자각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고조선의 역사를 그토록 염원하는 것은, 잃어버린 민족사의 원형이기도 하거니와, 가장 강대했으나 이상이 원대했으며, 인류의 모범 국가였기에 그 유전자를 받은 후손들이, 선조가 못다 이룬 ‘홍익인간’의 염원을 완성해야하는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명의 발원지 이자, 문화의 집합지 일 수도 있는 그야말로 신비의 땅 조선에 태어난 자의 운명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만물은 본래 자리로 귀의(萬法歸一)하듯이. 시원문명을 창도한 겨레야 말로, 문명의 혜택을 고루 나누던 ‘홍익인간’의 그 정갈한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인류의 이상에 기여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017. 1. 27. 동틀 무렵, 계룡산 연구실에서

 

- 한중교류문화 연구소 강의자료 탈고 -

 

미주尾註 -

** 실담어가 왕성하게 쓰였다는, 중천축국中天竺國은 언제 어디를 말하는가?

현 인도 공용어는 산스크리트가 아니라 힌두 어와 영어이고, 산스크리트어를 쓰는 인구는 브라만 사제 중심으로 약 5만정도 라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되어있는 베다 시대는( BC 1500-500) 청동기 후기부터 철기시대로, 장구하다.

산스크리트어는 철기를 소유한 아리안 족이, 인더스 문명을 창도한 드라비다 족을 제압한 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사카족 부처가 활동하던 시기는, 베다 시대 후기(BC 5-4).

당시 인도 북부-힌두 평원에 퍼져있던 소국들이 16대국으로 압축되고, 16대국은 다시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에 통합되고 있었는데, 부처의 나라 카필라국은 이웃 코살라 국에 통합되고, 마지막 승자는 동쪽 마가다국이 승리를 거두어 마가다 왕국을 세웠으므로, 부처는 이 마가다 왕국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마가다 왕국은 오늘날 공화정과 같은 자유도시를 탄생시킬 만큼 다양한 사상들이 꽃피고 있었다. 부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설법을 할 때, 상류층 말보다 민중들이 많이 쓰는 ‘팔리 어’를 즐겨 썼다.

브라만들이 쓰던 산스크리트어가 각 지방 방언과 섞이면서, 파생된 말을 프라크리트 어라 했는데. 이는 ‘순수한 말-산스크리트 : 속된 어-프라크리트 어’를 구분해 쓰인 것이다. 따라서 프라크리트 어는 우리말 사투리 같이 다양했다.

그러므로 부처가 즐겨 사용한 ‘팔리 어’는 프라크리트 어중 하나이며, 문자 없이 구전되었으므로. 부처 사후 여러 문자를 만나 경전을 기록하게 된다. 우리말이 한글을 만나 기록되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한편 BC 4c 문법학자 파니니Panini는 프라크리트 어로 인하여 순수한 산스크리트 어가 난삽해지는 것에 반발하여, 서북인도 지식인들이 쓰는 말을 주축으로 산스크리트 문법서『 아쉬타디아니Astadhyayi 』를 만들었다. 이를 베다 산스크리트어와 구분하여 ‘고전 산스크리트 어’라 하였다.

따라서 중천축국 중심으로 쓰였다는 ‘실담 어-고전 산스크리트 어’는 부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마가다국이, 부처 사후 60년 쯤 브라만출신의 장군이 마가다를 중심으로 인도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는 난다제국(BC 424-312)을 건설함으로써. 세력권이 커진 인도 중부의 상층 언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접하는 산스크리트어는 파니니가 만든 ‘고전 산스크리트 어’다.

여하튼 불경 찬술은, 부처 사후 비구 500명이 모여 불경 1차 결집이 동부 마가다왕국에서 있었고. 2차 결집은, 인도 북-중부를 장악한 난다왕국에서 부처 사후 100년 만에 700 장로가 모여 했으며. 3차 결집은 200년이 지나, 전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BC 324-180) 아소카 왕 때 있었다. 1,2,3,차는 모두 소승부 결집이다.

4차 결집은, 마우리아 왕조가 망하고 혼란기를 거쳐, 인도 북서부를 장악한 쿠샨왕조(AD 60-226)에서 하게 된다. 이 결집은「설 일체유부設一有部」등『대승경전』중심이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원래 불법은 일반 대중이 쓰던 팔리어를 바탕으로 설해졌으나, 팔리어는 문자 없는 구전이므로, 불경기록은 각 지역 문자에 의존하게 됨에 따라서-아소카 왕 석주 문장이 팔리어 구전을 산스크리트어로 옮겨 기록한 것처럼.

불경결집도 ‘고전 산스크리트’ 문자를 빌어 기록하게 되었다. 초기경전으로 대표적인 것이『아함경』이다. 이렇게 불경은 부처의 뜻과 다르게 고전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하게 되었다. 이후 ‘고전 산스크리트 어’로 된 경전이 중국에 전해져 북방불교 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구전 팔리어를 싱할라 어로 기록한 팔리어 대장경(경장, 율장, 논장)이 완성되어, 상좌(소승)부 중심 경전이 되었다.

이 경전이 초기불교 느낌을 간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중국에서 보는 당시 인도(천축)관한 기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나라 요 사렴姚思廉은『양서梁』에 ‘중천축국은 대월지국 동남쪽 수 천리에 있으며, 강역이 3만 리로, 일명 신독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장건이 대하(박트리아)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공()의 대지팡이와 촉()의 베 포를 보았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신독(인도) 시장에서 샀다고 했다. 중략 ()월지 고부로부터 서남으로 가면 서해에 이르고, 동으로 반월(월남?)에 이른다. 수십 나라가 있고, 나라마다 왕을 두었는데 이름은 다르나 모두 신독(인도)이다. (中天竺國 在大月支東南數千里 地方三萬里 一名身毒 漢世張騫史大夏 見邛竹杖蜀布 國人市之身毒 중략 從月支高附以西南至西海 東至槃越 國數十 每國置王 其名雖異皆身毒也)’ 했다.

당나라 두우가 지은『통전(通典)』에는, 천축은 후한後漢 시대 인도를 부르던 명칭이고, 신독身毒은 전한前漢(BC 206-AD8) 때 인도 명칭이라 했는데.

여기 대월지는 중국 감숙성 서쪽의 월지 족이 흉노에 쫓겨, 지금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박트리아 왕국을 깨고 세운 국가이다(BC 135-45). 이 대월지가 다시 서기 60년경 인도북부에 쿠샨왕조(AD 60-226)를 열었는데. 중국은 쿠샨왕조도 대월지라 불렀다. 쿠샨왕조 시대가 후한 시기(AD 23-220)와 일치한다.

쿠샨왕조는 인도 북부, 파미르고원을 장악하고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투루판 까지 손에 넣고, 실크로드 중개무역을 통한 이득과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상루트까지 확보하였다. 이시기 간다라 불교미술이 출현하고, 불경 4차 결집을 하는 등 북방불교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한편, 쿠샨왕조 이전 마우리아 왕조(BC324-180)3대 아소카 왕(BC 269-232)때 전 인도 통일왕국의 대업을 이루고, 전륜성왕으로써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하면서, 동남아시아 까지 불교가 성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전한(BC 206-AD8) 시대에 장 건이 대월지(大月支)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128년경으로. 박트리아 왕조를 접수하기 몇 년 전이며. 마우리아 왕조(BC324-180)가 망한지 50년 지난 후, 여러 나라가 다시 분립되는 혼란기였다.

당나라 두우『통전』말대로라면, 이 때 중국은 전한시대( BC 206-AD8). 인도를 ‘신독身毒’ 이라 부른 것이 된다.

어째든 요 사렴이 ‘중천축국 강역이 3만 리’ 운운 한 것은, 이 두 왕조 중 어느 하나이거나 둘 다 일수 있을 것이다.

원래 인더스 문명(하라파, 모헨조다로)을 일으킨 선주민은 드라비다 어를 썼는데, 기원전 15세기 아리안 족에 밀린 선주민은 남부로 내려갔다. 현 타밀지방, 북부 지구라트 등은 지금도 드라비다어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 드라비다 말과 한국어의 유사성은 많이 알려져 있다. 드라비다 언어는 알타이 계통으로 보고 있으며, 산스크리트어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

한편 BC 2 세기 경 산스크리트어를 쓰는 사카Saka 족 중 두 부류가, 파미르고원을 넘어 실크로드가 되는 타림분지에 나라를 세웠다. 남쪽에 호탄왕국, 북쪽은 툼슈크 왕조다. 그중 호탄왕국을 중국에서 우전국宇闐國이라 했고- 천년 불교왕국으로, 인도 쿠샨왕조가 망한 후 북방불교 교역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다. 타림분지 동쪽 끝 돈황 막고 굴에서 발견된 2300여 문서 중 거의가 호탄에서 쓰는 실담 어(산스크리트어+간다라 어)였으며, 그중 법구경도 발견되었다. 툼슈크 것은 15점이었다고 밝혀졌다.


1) 淮夷, 嵎夷, 島夷, 萊夷

2) 畎夷 于夷 方夷 荒夷 伯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3) 고조선이다. 중국 기록은 ‘조선’을 늘 다른 이름으로 적어, 그 기상을 꺾고 감추었다.


4) 『환단고기』 신시본기- 강태공이 자부선인의『삼황내문』뜻을 본받아『음부경주』를 지어 밝힌 후, 신선 도술의 방편으로 왜곡되었다 했는데. 선도(仙道)의 맥은 동이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5) 부루단군 때 중신, ‘하늘이 낸 효자’- 공자는『예기』에 ‘윤리의 시초며 소련, 대련은 성인’이라 씀


6) 단군은 태자에게 조선관경을 순시케 했는데, 이 때 순임금은 치수담당 사공司空 를 도산회맹塗山會盟에 보냈다, 우는 ‘오행 치수 법’을 전수받아 당시 과제였던 9년 홍수를 다스려, 그 공덕으로 하나라를 개창했다.『오월 춘추』『묵자』『세종실록』등에도 실렸다. 도산은 지금 항주 아래, 절강성 회계산會稽山이다.

7) 청동기: 고조선 BC2500 - 중국황하문화 BC2200 - 카라수크 문화(시베리아) BC1200

(『한국고대복식』, 박 선희, 지식산업사, 2009, 564~565)


8) 중국을 높이고 오랑케를 깎아 내림

9) 이상범은 ‘아시아의 고대 역사 주체는 중국이 아니라, 바로 한국임’을 밝힘. 이 책은 미국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유수 대학의 동양학 교재로 쓰이고 있다.

10) 섬서 성 기산 현 기수岐水를 말한다.


11) 옛적 북방 초원에서 가축은, 국가의 자산이자 사람 생명과 직결된다.

12) 강 상원-철학자 이자, 언어학자. 우리 ‘토속 사투리’가 세계 언어 뿌리인 산스크리트어와 완벽히 일치함을 ‘산스크리트 옥스퍼드 사전’에서 발견. 세종 때 충북 법주사 고승이던 신미 대사가 실담어에 정통하여, 세종의 ‘한글창제’에 깊이 기여한 인물임을 갈파. 확신을 얻은 후, 그간 알 수 없던 우리말의 어원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음.

13)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김 정민, 그로벌콘텐츠, 189


14) 『한국고대복식』 박 선희, 지식산업사, 2009, 594~597


15) 박 선희, 같은 책

16) 『흠정만주원류고』 책머리, 유지諭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