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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봉의 왕가는 어떤 왕일까?

양각산 2019. 12. 5. 08:56


대전 유성구의 왕가봉, 왕가산촌의 유래를 알려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좋은 글을 찾았다.

돌까마귀님의 글을, .....

감사합니다. 돌까마귀님.

  2019. 12. 5. 양각산


만인산의 이성계 태실 자리와 신도안은 어떻게 정하여 졌나? 

태조 2년 계유(1393년,홍무26년)

*12(무신)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돌아와서 상언(上言)하기를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찾았습니다.”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지도(都邑地圖)도 바쳤다.

*17일(계축) 삼사 좌복야(三司左僕耶射)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태실(胎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珍同縣)에 안치(安置)하고, 그 현()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으라 하였다. 그리고 “이달 18일에 계룡산(鷄龍山)으로 거둥할 것이니 대성(臺省)에서 각기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義興親軍)이 시종(侍從)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19일(을축) 임금이 송경(松京)을 출발하여 계룡산(鷄龍山)의 지세(地勢)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고 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安宗源), 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따라갔다.

*121일(정묘) 회암사(檜巖寺)를 지나면서 왕사(王師) 자초(自招= 무학대사)를 청하여 같이 갔다.

*122(무진) 임금이 병환이 나서 한강(漢江)가에서 4일 동안을 머물었다. 순군(巡軍)으로 하여금 인가(人家)를 소요(騷擾)하게 한 자를 잡아서 곤장을 때려 군중(軍中)에 보이게 하였다.

*21(병자) 이른 새벽에 임금이 거둥하려고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니,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요(鄭曜)가 도평의사사의 계본(啓本)을 가지고 내려와서 현비(顯妃)가 병환이 나서 편치 못하고, 평주(平州)와 봉주(鳳州) 등지에는 또 초적(草賊)이 있다고 아뢰므로,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초적(草賊)은 변장(邊將)의 보고가 있던가? 어떤 사람이 와서 알리던가?”하니, 정요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 대족(世家大族)들이 함께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口實)로 삼아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송경(松京)에 오랫동안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하니, 좌우(左右)에서 모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남은(南誾)이 아뢰기를, 신 등이 외람히 공신(功臣)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행차는 이미 계룡산(鷄龍山)에 가까이 왔사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가서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시옵소서. 신 등은 남아서 초적(草賊)을 치겠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王朝)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계룡산(鷄龍山)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옳지 않다고 저지(沮止)시킨다면,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하고 어가(御駕)를 돌리게 하였다. 남은 등이 이민도(李敏道)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니, 현비의 병환도 반드시 나을 것이요, 초적(草賊)도 또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하므로, 서로 모여서 의논하고 가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정요를 처벌한 뒤에 가자.”하니, 남은이 아뢰기를, 어찌 정요를 처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길을 떠나 청포원(靑布院)의 들에 이르러 유숙(留宿)하였다.

*25일(경진) 어가가 청주에 이르니 목사(牧使) 진여의(陣汝宜)와 판관(判官) 민도생(閔道生) 등이 나례(儺禮)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扶老)들은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어가(御駕) 앞에 절하였다.

 

유성온천과 왕가봉에 이성계가 다녀 갔나?

청주에서 계룡산 신도안까지 가는 길은  회덕, 진잠, 신도안으로 갈수도 있고, 회덕, 유성, 신도안으로 갈수도 있다. 왕가봉(왕좌봉)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볼때 이성계는 청주, 회덕, 유성, 신도안으로 간 것으로 추정이 되나, 유성 온천에는 머물렀을까? 26일자 실록에 '남방에 붉은 해무리가 끼었다'는 기록만 있고, 이틀동안 유성에 머무를 시간은 되나 기록은 없다.


 

*2월 8일(계미) 계룡산 밑에 이르렀다.

*2월 9일(갑신) 햇무리가 지더니 저물어서야 없어졌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새도읍의 산수(山水)의 형세(形勢)를 관찰하고서,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成石璘)상의문하부사(商儀門下府事) 김주(金湊) 정당 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에게 명하여 조운(漕運)의 편리하고 편리하지 않은 것과 노정(路程)의 험난하고 평탄한 것을 살피게 하고, 또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와 남은(南誾)에게 명하여 성곽(城郭)을 축조할 지세(地勢)를 살피게 하였다.

*210일(을유) 삼사 좌복야 영서운관사(三司左僕射 領書雲觀事) 권중화(權仲和)가 새 도읍의 종묘(宗廟), 사직(社稷), 궁전(宮殿), 조시(朝市)를 만들 지세(地勢)의 그림을 바치니, 서운관(書雲觀)과 풍수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 배상충(裴尙忠) 등에게 명하여 지면(地面)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먹줄()로써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211(병술) 김주(金湊)를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대학사(大學士), 한상질(韓尙質)을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도흥(都興)과 이무(李茂)를 개성 윤(開城尹)으로, 유양(柳亮)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남재(南在)를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안경공(安景恭)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도평의사사(都評議使使), 박신(朴信)을 사헌 시사(司憲侍史)로 삼았다.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 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

*213일(무자) 임금이 계룡산에서 길을 떠나면서 김주(金湊)와 동지중추(同知中樞) 박영충(朴永忠), 전 밀직(密直) 최칠석(崔七夕)을 그곳에 남겨 두고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였다. 13일 밤을 유성온천에 머무를 시간은 되나 기록에는 없다.


*2월14일(기축) 임금이 돌아와서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3월 8일(계축) 신도건설을 백성들에게 의지하다.

*324(기사) 계룡산에 새 도읍을 정하였는데, 기내(畿內)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가 모두 81이었다.

향소(鄕所):특수한 지방의 하급 행정구획. ()은 부곡(部曲)과 비슷한 행정구역의 하나. ()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금····[종이·도기(陶器() 등을 만들기 위하여 두었던 특수 기관으로서 여기서 일하는 공장(工匠)은 죄인 또는 천민의 집단이었다.

*41일(을해) 신도건설을 공장(工匠)들에게 의지하다.

*814일(정해) 첨절제사(僉節制使) 진충귀(陣忠貴)를 양광도에 보내서, 주군(州郡)에서 역도(役徒)를 보내어 기일 내에 미치지 못한 사람을 조사하게 하여, 수령(守令) 9인을 매질[]하고, 안렴사 조박(趙撲)을 한양부(漢陽府)에 가두었다.

*94일(병오)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도전라도 안렴사에게 공문을 보내서 역도(役徒)를 내어 신도(新都)에 보내게 하였다.

*928(경오) 임금께서 병환이 나서 편치 못하므로 도평의사사에 명령하여 피접(避接)해 있을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930(임신) 서운관(書雲觀)의 관원을 궐내(闕內)에 불러서 임금이 옮겨 거둥할 길지(吉地)를 점치게 하였다.

*1119일(경신) 내원당 감주(內願堂監主) 조생(祖生)이 임금을 진현(進見)하였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새 도읍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민력(民力)을 쓰게 됨을 염려하여 말하기를 중들 중에 노는 사람이 많으니 마땅히 모아서 역사(役事)시켜야 되겠다.”하니, 각 종파(宗派)의 중이 이 말을 듣고는 중들을 권유 모집하여 역사(役事)에 나가고자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 되었다. 조생(祖生)이 인솔하여 나아오니 임금이 기뻐하여 조생에게 음식물을 주고, 각 종파(宗派)의 중에게는 명주와 면포(綿布)를 내려주었다.

*1128(기사)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를 계룡산에서 불러 올려 의복과 술을 하사하였다.

*1129일(경오)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를 새 도읍 건설지로 다시 내려 보냈다.

*1211(임오) 대장군(大將軍)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였다.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윤(河崙)이 상언(上言)하였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 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명하여 글을 바치게 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南在) 등으로 하여금 하윤과 더불어 참고하게 하고, 또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봉상사(奉常寺)의 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山水)가 오고 간 것으로써 상고해 보니 길흉(吉凶)이 모두 맞았으므로, 이에 효생(孝生)에게 명하여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호순신(胡舜臣)의 글이 이로부터 비로소 반행(頒行)하게 되었다. 임금이 명하여 고려 왕조의 서운관(書雲觀)에 저장된 비록 문서(秘錄文書)를 모두 하윤에게 주어서 고열(考閱)하게 하고는 천도(遷都)할 땅을 다시 보아서 아뢰게 하였다.

 

이성계는 왜 신도안 건설을 철회하였나?

이성계의 아주 강했던 왕도 건설 의지가 종2품인 하륜의 상소로 철회가 되었는데 과연 호순신의 풍수학 이야기 만으로 이성계의 신도 건설 의지를 꺾을 수 있었을까? 이성계는 계룡산은 암룡이고 암룡이 알을 품는 자리를 현재의 신도안으로 보고 신도 건설에 강한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륜이 “왕께서 왜 용알이 머무는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까?. 임금은 용이고 신도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리는 용의 자리가 아닌 용알의 자리일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면 왕이 아무리 신도건설 및 천도의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용알 자리로 천도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돌까마귀님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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