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국 연맹체 가야의 명칭이 7개인 이유에 대해서..
6가야에 소가야(고성), 성산가야(성주), 고령가야(진주),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금관가야(김해)가 있다고 알고있었는데요
창녕비를 공부하다 보니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정복하고 세운 비석이 창녕비라고 하네요..
빛벌가야를 검색해보니 비화가야라고 나오고요,
네이버 국어사전에 보니까 비화가야가 6가야 중 창녕 지역에 있던 나라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찾아보니 삼국유사에 가야의 명칭으로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금관가야, 소가야, 비화가야가 나온다고 하네요.
질문은요,
6개국 연맹체인 가야의 각 나라 명칭이 7개인 이유가 뭔가요?
그리고 ㅇㅇ가야라는 명칭이 신라, 고려사람에 의해 붙여진 거라고 하는데
지금 알려진 ㅇㅇ가야는 당시에 어떤 명칭으로 불렸는지 각 나라마다 좀 적어주세요.
흔히 6가야 연맹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는 수로왕의 건국 설화에서 비롯된 명칭일 뿐, 실제 가야지역에는 이보다 많은 국가가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비화가야인 것이구요.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 하나는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가야는 옛 변한 지역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3세기 중반 이후, 바로 이 변한 12개 소국들 중에서 몇 개의 소국들이 연맹을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가야 연맹입니다.
잘 알려진 국가들이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금관가야 등이고, <삼국유사>는 비화가야의 이름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서기>는 탁순이나 탁기탄 등의 국가들까지 거론하고 있구요.
사견으로는 이렇습니다.
첫 시작은 6가야 연맹으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수로왕의 신화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지요(보통 신화는 후대에 이르러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남은 5~6개의 전 변한의 소국들은 그대로 도태되었을까요?
일부는 복속되고, 일부는 반항하고, 일부는 연맹에 가입했겠지요.
비화가야는 바로 그 연맹에 가입한 소국인 것입니다.
반면 친백제세력이었던 탁순국(창원)은 가야 연맹에 반항했던 소국이었습니다.
참고로 '김태식 저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에 따르면 북부 12개국, 남부 15개국 하여 총 27개국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는 문헌상으로 보이는 국가들을 다 나열한 것이기 때문에, 전부 존재했다고 섣불리 말하긴 어렵습니다.
금관가야를 가락국 혹은 금관국, 대가야를 반파국, 아라가야를 안락국, 성산가야를 벽진국, 소가야를 고자국으로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만,
금관가야나 대가야 등 가야의 모든 소국들이 신라나 고려에 의해 잘못 붙여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령가야나 성산가야처럼 중심 세력이 아니었던 가야의 경우, 신라인들이
6개국연맹체 가야의 명칭이 7개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질문에 대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6가야는 허구적인 성격이 짙고, 가야 내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소국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게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이지요.
고령가야나 성산가야는 그 존재에 대해 의심받고 있으며,
가야시대에 존재하였다기 보다도 고려시대에 그쪽 지방에서 자신들을 좀 더 드높일 목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게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창녕 진흥왕 척경비이죠.
이 내용을 보면 이곳을 비자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른바 비화가야라고 일컫는 가야의 소국이 있던 곳으로 비자벌국, 혹은 비사벌국으로 불렀던 곳이지요.
일본서기에는 비자발이라고 나오며 이곳과 관련해서는 여러 유적들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교동고분군과 화왕산성의 모습으로 둘 다 창녕에 있는 비화가야의 유적지입니다.
교동고분군의 뒤쪽엔 목마산성이라는 산성이 있는데 이도 가야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지요.
이 교동고분군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이들은 현재 창녕박물관에서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화왕산성은 화왕산이라는 높고 험준한 산에 자리잡은 산성으로 정상부에 성벽이 빙 둘러 싸고 있는 형세를 하고 있으며 아래에서는 위의 내부가 보이지 않지요.
이번 화왕산 억새태우기 행사로 인하여 참변이 있긴 하였지만, 역사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큰 곳입니다.
비사벌국은 본디 금관가야, 즉 가락국과 밀접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낙동강을 따라 김해와 그 거리도 가깝고, 이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교역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토기 양식도 보면 일부 다른 점이 있지만 전반적인 틀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4세기 말, 5세기 초에 고구려의 남하로 이곳 일대가 전쟁터가 되버리죠.
비사벌국은 가야와 신라 중에서 신라 쪽에 손을 잡고 그때문에 피해를 모면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금관가야는 그 사건으로 쇠퇴의 길을 걷지만, 비사벌국은 점차 신라에 복속되어 가지요.
그리고 6세기 전반 쯤에는 신라에게 어느정도 우호적인 조건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이곳은 신라의 땅이 되지요.
이 외에도 수많은 가야의 소국들이 존재하였고, 그들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연맹체를 맺어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활동하였지만,
이 연맹체 자체가 한 시대에 여러개가 존재하는 등 조금 분산된 모습을 보여주어 결국엔 하나로 뭉치지 못해 쇠퇴한 것으로 보이지요.
re: 6개국연맹체 가야의 명칭이 7개인 이유에 대해서
님이 아주 열심히 공부하셨네용ㅋㅋ
님이 말씀하듯이 가야는 6개의 연맹체 왕국이었죠ㅋㅋ
돌아가면서 힘쎈 부족이 연맹왕국의 대표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고구려, 백제, 신라도 마찬가지요.
이 세나라도 중앙집권적 국가 되기 전까지는 연맹왕국으로서 부족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각자 지방의 이름을 따라 앞에는 지방 뒤에는 가야라고 붙인거지요
가야라는 명칭은 고려,신라 전부터 불린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고서는 일연의 삼국유사, 김부식 삼국사기 이거는 고려시대때 써진 거니까요
허나 일본의 역사서를 보면 한반도 4~6세기 가야라는 말이 나오고
다만 이것이 가야(伽倻:加耶, 伽耶)·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 이렇게 쓰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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