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상가에 갔다가 ......

양각산 2011. 2. 17. 10:41

2011년 2월 15일의 오후 1시에 누굴 만날 약속이 있었다. 저녁 여섯 시에는 계 모임이 있었고 .....

점심은 간단히 집에서 먹고 한 시 시간에 맞춰 나가려 여유를 부리는데 메일이 들어왔다. 직장 동료였던 분의 부친 상의 부고였다.

 홀로 먹으려던 점심을 그 상가에서 먹기로 한다. 집식구는 홀로 보문산에 갔기에 초라하게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11시 반 쯤 집을 나서 충대병원 장례식장에 갔다.

문상을 하는데 그 여동료는 없고 남자 상주 셋만 있다.

건장하신 망인 사진이 있고, 성경이 놓여있다.

 나는 문상할 때 절로 한다. 성경이 놓여 있어도 절로 해야 예를 표한 것 같다.

오늘은 왠지 절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엉거주춤 5도 정도 허리를 굽히고 묵도로 예를 올렸다. 어쩌면 절 같은 기도일 듯하다.

그 중에서도 갈등이 일었다. 10초를 숙여야 하나 30초를 묵도해야 하나.....

애도의 기도 말은 생각도 안하고 갈등만 하다가 애도 형식을 마쳤었다.

 

 식사 자리에는 이선희님이 계셨었다. 내가 모르는 젊은이로 내가 퇴직 후 온 사람과였었다. 셋이서 앉았다.

아버님은 몇 세셨어요? 76세였어요.

좀 일찍 돌아가셨네요라는 내 말에, 그녀도 동감하며, '좀더 사실 줄 알았는데, ....' 한다.

지병이 계셨던가요? 하니, 당뇨에 투석까지 하셨단다. 반 년 남짓 그랬었나 보다.

 내 주변에 당뇨로 투석하며 10년 넘게 병마와 싸우는 이도 살아 있는데, 의외스러워했다.

그녀도 동의하며, 그럴 줄 알았으면 자주 찾아뵐 것을 하며 후회스러워 했다.

 언제 찾아뵜는데? 하니, 지난 수요일과 금요일에 뵈었단다. 어제 월요일에 돌아가셨으니 이틀을 못 찾아 뵈었구나 생각했다.

 

 장지는 어다로요?

깜짝 놀랐었다. 시신을 대학에 기증하셨단다. ....... 정말 충격이었다.

자기들도 놀랐단다. 대학 당국에서 기증하겠다는 증서를 보여주어서 알았다 했다.

 나는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화장은 아니해도 되고, 묘도 만들 필요가 없고, ......

다음 질문은 요랬다. 

성묘는 어떻게 하지? 말하고도 정말 수준 떨어지는 말이다 싶었다. 쑥스럽다.

그녀 왈 추도 예배로 하면 돼요 했다.

 망인께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장로이셨단다. 다니는 교회를 몸소 지었나 본다.

그리고 평생을 교회 직장 집 세 군데만 왔다갔다 하셨단다.

대단한 신앙인으로 봉사하면서 거룩하게 살다가, 소천하셨음을 알겠다.

 

 이선희 선생은, 아버님 주검을 접하고 기도를 올렸었는데 하늘로 오르심을 느꼈었다 했다.

뽀얀 손으로 하늘을 향해 오르는 형상을 지으며 행복해 했다.

주검의 아버님의 손에서 그제서야 차가와 지더랬다.

 이선희 선생의 하얀 얼굴과 평온함에서 천사를 느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