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학소 민중 봉기 기념탑
대전의 중심은 어데일까!
지금은 이름을 잃은 삼천동의 진산, 남선산이라는 설을 들은 듯하다.
이곳에 훌륭한 공원이 있으니 그게 남선공원이다.
이 남선공원 남선산의 꼭대기에 정자가 있는데 남선정(南仙亭)이고,
정자의 마루바닥은 정팔각형으로 그 각을 이어 선이고, 그 선은 사방팔방을 가리키고 있다.
이 정자에서 300여m의 정북에 한 기념탑이 있는데, 명학소(鳴鶴所)기념탑이다.
이 鳴鶴所기념탑은, 우리가 옛날에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서너 줄로 보았던 '망이 망소이 난'의 현장에 세워진 탑이다.
'망이, 망소이의 민중봉기 기념탑'이라고도 하는 이 난을 공주에서 일어난 것으로 역사에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실은 여기 대전시 서구 탄방동에서 일어났었다.
옛날에는 여기가 공주목의 변두리였었기에 그리 기록했지만, 지금은 공주와는 너무 멀리 떠러져 있는,
대한민국의 중심인 대전의 한가운데 있으니 마땅히 대전으로 고쳐야 맞겠다.
찾은 날 : 2016. 4. 3. 일요일
찾은 곳 : 명학소기념탑(망이 망소이 민중 봉기 기념탑) - 대전시 서구 탄방동 남선근린공원
누구랑 : 대전둘레산길 회원들과
교통 : 시내버스(106 108 514 705 816) 남선공원네거리에서 하차 또는 지하철을 용문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5~10분
남선공원 들머리는 사방 네 곳에 있으니 ......
* 망이 망소이 난
"1176년(명종 6) 정월에 망이·망소이는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규합해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자칭하고, 본읍인 공주를 함락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 낭장 박강수(朴剛壽) 등을 보내어 선유(宣諭)했다. 그러나 봉기군은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뒤이어 대장군 정황재(丁黃載),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인솔해 온 장사(壯士) 3,000명을 물리칠 정도로 그 규모와 세력이 컸다.
이에 정부는 무력에 의한 토벌을 중지하고 회유책을 펴 망이의 고향인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며 선유했다. 그러자 봉기군은 국왕에 대한 봉건 관념으로 일단 기세가 꺾이는 듯했으나, 곧 중앙정부의 회유책이 기만임을 깨닫고 다시 예산현(禮山縣)을 공격하여 감무를 살해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무렵 이른바 남적이라 하여 그들의 봉기에 영향받거나 동조하는 듯이 보이는 민란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정부는 다시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처치병마사(處置兵馬使)로 삼아 남적을 토벌하게 했고, 망이·망소이 등은 1177년 정월에 항복했다. 중앙정부는 항복한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향리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다시 병사를 보내어 망이 등의 어머니와 처를 가두는 기만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달에 다시 봉기하여 가야사(서산에 위치함)를 약탈하고, 3월에는 홍경원(직산에 위치함)을 불태우며 10여 명의 승려를 살해했다. 이어서 아주(牙州 : 아산)를 함락하는 등 그 기세를 떨쳤으나, 7월에 마침내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망이·망소이 등의 봉기는 특수 부역집단(賦役集團)인 소민(所民)이 중심이었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출처 - 다음백과
* 향소부곡제 : 향소부곡 (鄕所部曲) 소·장·처가 있었다. 당시 경·목·도호부·군·현 등의 집단을 총칭하여 군현제(郡縣制)라 하고,
향·부곡·소·장·처 등을 흔히 부곡제(部曲制)라고 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군현조직은 군현제와 부곡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향·소·부곡 등은 당시 군현체제의 한 영역으로 편제되어 국가의 주요한 수취 단위가 되었다.
여기 명학소도 부곡제의 한 '所'로, 숯을 구워 관청에 올렸던 하급 기관으로 노동착취를 당했기에 봉기했었으리라.
'대전둘레산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둘렛길 화요 산행 (0) | 2016.04.29 |
---|---|
대둘테마산행(남선공원~매봉중학교) (0) | 2016.04.10 |
대둘테마산행(닭재~옥천 척화비) (0) | 2016.03.08 |
대둘토요산행 4구간(닭재~식장산) (0) | 2016.01.13 |
樂山水(요산수, 집식구 닉)님 대전둘레산길 안내 마지막 산행 (0) | 2016.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