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둘레산길

부리면계(성인봉~창평교)

양각산 2015. 11. 2. 14:50

 부리면계(성인봉~창평교) 마지막 회

 

언제 : 2015. 11. 1. 일요일

누구랑 : 홀로

교통 : 승용차로(창평교까지)-도보(창평교-봉황천-68지방도-(사담-35번고속도로 밑-금산IC진입로-기시대교-버스승강장)-가선리 행 버스 승차(07:49)-

          원골 하차(07:54)

봉황천 창평교에서 월영산 방향

 

       *  금산 발 가선리 버스 시간 07:35를 맞춰 갔었는데, 많이 일렀었다. 그래서 부리면계가 되는 봉황천 건너 68번지방도를 걸어 내렸었다.

             오늘 걸을 부리면계 산마루금을 가늠한다. 먼저 봉황천으로 내리는 맥줄기를 확인하고, 저 멀리 월영산 오른쪽으로 뾰족히 보이는 성인봉과 그 서남쪽에 야트막한 구라리산의 면계봉을 어림했었다.

             기시대교를 건너 명암리까지 가려면 너무 멀 듯해서 발걸음을 빨리하는데  그전에 승강장이 보이고, 거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선리버스가 나를 추월하여 선다.

             달랑 한 손님만 탔고, 제원에서 그는 내렸고,  원골 월영산 들머리에서 내리겠다니 기사는 흔쾌히 들어 주었다. 오늘 산행은 순조롭겠구나 싶었다.

             ....... 그러나 산행은 험난했었다. 무려 11시간의 고난이었었다.

산행 일지 : 집(06:35)-창평교(금산군 부리면 창평리, -7:10)-도보(~명암리, 07:49)-버스 승차-월영산 들머리(07:54)

        산행 : 월영산 들머리-원골 펜션 진입도로-원골천-다리(08:05)-계곡 등산로-합수점 오른쪽 등로(08:19)-마루금(당재, 제원면 천내리와 용화리의 경계,

                   08:41~09:34)-성인봉과 월영산 분기점 봉(금산군계 봉, 자사봉, 09:07~12)-당재(09:34)-봉(09:36, 제원면 천내리와 용화리 경계 마루금)-

                   왼쪽 마루금-지웃재(테소골재, 살구나무재, 서낭댕이재, 09:50)-정환춘님 만남-정환춘 조모 묘(10:05~15)-성주산 갈림길(백하지맥좌회, 제원면,

                   부리면 경계점, 왼쪽 마루금과 직진 마루금이 모두 부리 면계가 됨)-봉(구라리산?)-직진-창령성씨 묘(10:45, 많은 갈등 끝에 U턴)-성주산 갈림길

                   (11:15)-지웃재(11:25~56, 용화나루터로 가는 재)-농막-옛나루터 자리(12:41)-금강 右岸으로 거슬러 오름-면계(금강)-백골 들머리(14:59)-

                   구라리여울-농박골들머리(15:10)-어재리 금강 제방도로-원통천(15:23)-귀투리(금강 우안으로는 신촌으로 갈 수 없음)-동재-신촌 들 귀투릿길-

                   신촌 금강둑길-금강(다리, 15:57)-인삼골오토캠핑장-농장 및 매점(16:09)-가막골재(16;17)- 김성골재(16:50)-면계봉-(16:55, 금강에서 올라오는

                   면계)- 성치지맥(17:17)-재(김성리와 기물리 간의 재, 17:28)-성치지맥에서 분기하는 면계-봉황천-백암리-창평뚝길도로-창평교(18:45)   

 

 * 산행 후기

구라리산을 다 가서 알바로 착각을 일으켰다.

성주산이 왼쪽으로 보이고 그 밑에 양각산에서부터 오는 임도가 농박골로 내리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백골을 지났기에 면계가 아니구나 했었다. 그냥 바로 내리면 금강에로 내리는 마루금인데 .........

 

사진 중앙 외딴 봉 바로 왼쪽 봉이 구라리산이고 오른쪽 골짜기가 농박골이다

사진 중앙 오른쪽으로 가장 까마득히 보이는 산이 성주산이고 ......

 

서낭당인 듯한 돌무덤이 있는 재를 지날 때, 50여m  앞서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소리쳐 불러세우고 그와 많은 말을 질문하여 정보를 알아 봤었다. 

그는 지내리에 산다 했고, 지내리는 행정명이고 자연부락은 넷이랬다. 모리 조령 광평 지내가 있는데 그를 통합하여 지내리라고 했다.

내가 질문했다. 금산 어재리의 백골로 들어 지내리로 넘는 재가 있는데 그 재이름이 무어냐 물었는데, 그는 그재를 어렸을 때 넘어 봤다면서도 재 이름은 몰랐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그 재를 '백골재', 또는 '늠벌재,라고 하는데 ...... 하자, 그이는 지내리에 광평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이 가장 크다며 넓을 광자로 '넘벌.이라고도 하여 그렇게 불렀으리라 했었다.

내가 토를 달았다. 아저씨는 한학을 많이 했나 보네요 하니, 그는 한문은 별로 안하고 영어니 독일어는 했다 했었다.

그리고 그가 대학 졸업자로 서울에서 말단 공무원 등 10여 년을 하다가, 중이염을 앓아서 낙향했는데 그 때 나이가 33세였다 했었다. 

 그의 손에는 소주 한 병에 검정비닐에 과포일 듯한 봉다리를 안고 있엇다. 자기 조모 묘에간다며 ......

다시 조금 전에 지나온 재에 대해 질문했었다. 그는 테소골재라며, 이 재를 넘어 금강에 다다르면 용화나루터가 나오고, 배를 타고 건너 외할머니가 사시는 닭실을 뻔질나게 다녔다 했었다.

닭실은 제원면 저곡리로 高씨가 많이 사는데, 그의 어머니가 제주 고씨였다며 ......

조모 묘소는 성주산 갈림길 전 다소 높은 봉 마루금 오른쪽 의 제원면 용화리의 땅에 있었다. 봉분은 그리 크지 않으나 묫벌은 넓고 벌초도 잘 되어 있었고, 작은 비석에 자손들의 명이 빼곡했엇다.

일제 때에 모든 마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자기 할머니도 공동묘지에 묻혀 있었는데, 밤에 많은 인부를 고용하여 이 곳으로 이장했다했었다. 일본놈들은 공동묘지가 아닌 데다 묻으면 두들겨 팼다며 .....

나도 모르는 왜놈들의 포악상을 처음 들었었다.

밤에 초롱불을 켜고, 휘장을 치고 몰래 했다며, 강 건너 용화 사람으로부터 신고가 들어올 것을 염려했다며, 지금은 삼림이 빽빽하지만 그 때는 벌거숭이 산이었다며, ......

내가 물었다. 연세는? 73세라 했다. 나보다 겨우 둘밖에 많지 않은데, ......농사하느라 많이 힘들었구나 싶었다.

알바하고 되돌아와 보니, 그 묘소에는 그 분은 없었다.

그런데 그 재에서 두 여인과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정씨 부인과 집안 여자일 듯싶었다.

그녀들에게 달겨들어 그 재 이름을 물었다. '테소골째'라 했다. 정환춘님은 '케소골재'라 했는데 대질하여 테소골재로 정리하고, 테소골은 성인봉 밑 금산땅의 골짜기일 듯싶었다.

달리 부르는 이름은 살구나무재라며,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며 그 그루터기를 가르켰고, 서낭댕이재라고도 부른다 했었다.

그네들도 넷이 함께 올랐었는데, 정씨만 바로 올랐고 셋은 알바했었다. 대전에서 온 한 이는 지금껏도 알바를 하고 있는 중이랬다.

     

정환춘님

 

혹 이 재가 늠벌재(백골재)가 아닐까.

그래서 좀 되돌해서 금강으로 빠지는 마루금을 밟아 봤는데, 금방 아닐 것 같아 이리 방황 저리 방황하다가 그냥 재를 넘어 용화나루터 금강으로 뺐었었다.

그러다 갈대 정글, 가시덤불 정글, 암벽벼루 장벽을 헤치고 넘고하다가 옷이며 신발이며 장갑이며가 큰 상처를 입었고 디카도 못 쓰게 되었으니, .......

고장난 디카 사진(13:07)

늦어도 세네시면 창평교에 이르려니 했었는데 거의 일곱시라!

 

대충 그간 못한 면계를 모두 한 것으로 간주하고, 부리면계를 마친다.

부리면계는 참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졌었다. 

 

마자막 디카 사진(용화나루)

 

* 늠벌재 : 지웃재, 기웃재, 백골재 등으로 불리는 듯한데, 지웃산 아래에 있는 재이기에 지웃재가 표준 지명일 듯싶다.

               오늘 부리면곗길 구라리산을 내리다 한 비문을 접했는데, 거기에 芝牛峙라는 단어가 보이던데 .... 아마 지웃재를 한자어로는 지우치인 듯싶다.

              

 

* 오늘 한 부음을 받았다. 외숙모님이 어젯밤 9시에 돌아가셨다는 ......

     그 외숙모님은 경찰이었던 큰외삼촌의 부인으로 일찌기 청상이 되셨다. 6 25 때에 화를 입어 돌아가셨고, 아들 하나만 달랑 있는데, 그는 나보다 두살이 밑이다.

     오늘 오후 다섯 시 경에 상가에 갔다가 그 외종사촌 동생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지웃재 얘기를 듣게 됐었다. 외핳머니 산소가 거기에 있다 했었다.

     내 그 지웃재의 소재를 명쾌히 몰라 지금도 헤매고 있는데, 돌아가신 외숙모님 얘기를 제치고 그 지웃재를 묻기에 이성을 잃을 정도였었다.

     용화나룻터를 건너 지내리로 넘는 그 재가 지웃재라 한다. 하이고, 등하불명이라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했었다.

     집에 와 그것의 확인을 하고자 컴퓨터를 켰다. 박달령님의 산행기를 뒤지니, 지도까지 곁들인 산행기가 나왔다.

     정환춘씨가 알고 있는 테소골재, 살구나무재, 서낭댕이재가 바로 지웃재 또는 기웃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외종 아우는 그 재에 살구나무가 아니라 아름들이 돌배나무라 했었다.

     내일 외숙모님을 잘 뫼시고, 연후에 그 지웃재 얘기를 더 나누어야지. -2015. 11. 15. 밤 10:10-

 

오늘(11. 16.) 장례를 모신 후 또 지웃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마다 벌초를 다니는 다른 외종 동생이 지웃재와 외할머니 묘소의 위치까지 알려 줬었다.

지웃재에 있었던 나무는 살구나무라고 정정해 주었다. 6~7년 전에만해도 그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어른의 두 아름이 넘었을리라고 했었다.

그 살구나무는 수령이 4~5백년은 됨직하여서, 지금까지 남았다면  대단한 보호수로 지정됐을 것이라 회고했엇다.

어떤 무자비한 자의 소행을 분개했었다.

 

아무래도 이 곳을 다시 한번 가 봐야하겠다.

 자사봉 지웃재, 그리고 구라리산의 면계를 거쳐 금강으로 내려야지.

 아니면, 성주산 백골재 구라리산을 거쳐 금강으로 내리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