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진

거제도에 칠천도가 있다는데

양각산 2014. 6. 7. 09:37

 현충일은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게 정석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 모임에서는 여행을 추진했었다.

본디 모임은 매년 석가탄신일이었지만 그 때는 연휴로 회원들이 이리저리 얽혀 참석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었다. 그래서 현충일로 여행 날을 잡았었는데 ......

여행 장소는 거제도의 칠천도, .....

내 거제도는 안 가 본 데가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 많이 다녔다고 자부하는데 처음 듣는 곳이다.

때문에 안 가 본 데를 간다는 것에 나름대로 기대를 했었고, 집결지로 갔었는데 .......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관광차가 큰 버스가 아닌 24인승이었고, 목적지도 수정하려는 듯한 분위기였었다. 차가 작고 좁아 그 먼 데까지 가기는 불편하고 힘들어서란다.

관광지까지 수정하려는데, 우리 회원 하나가 목적지 하나는 지켜야 한다해서, 거제도 칠천도로 가게 됐었다.

                                

우리 수석회 회원 9명, 다른 팀 6명, 모두해서 15명이다.

내용인 즉 회원 모집에 실패했고 이 인원으로는 손해나는 일이라 대형버스로는 어려워 다른 회사 미니버스를 대치시켰었나 보았다.

7년만에 모처럼 나왔다가 낭패 만났다는 고 여사와 그의 불교 교우 하나, 네 여성의 한 팀.....  우리 회원 9, 플러스 다른 회원 6, 이퀄 15명이다.

 낭패는 그것뿐이 아니었었다.

칠천도는 연육교가 놓인 섬이었는데, 계약에는 유람선 타는 계약이 있었다.

유람선 선착장에 내리니 유람선 사무실이 잠겨 있었다. 화장실 문까지 잠겨 있어서 여자 회원들은 고통이 더 심했었다.

승객이 없어 영업을 접었다 했었고, 볼맨소리로 항의하는 우리에게 운전사는 아침에 통화할 때는 폭풍이 없는 한 운행한다 했다 한다. ㅎㅎㅎㅎ

버스로 대충 칠천도를 돌고 거제도로 나와, 다시 신거제대교를 건너 통영에로 와 중앙시장에서 점심.

시장 진입에 거의 30분 여 걸렸었는데 더욱 고통스러웠었다.

점심 후 남망산공원에 올라 30분여 구경하고 4시 좀 넘어 대전으로 달렸었다.

굳이 여행의 의미를 찾는다면, 유람선에 쓰여있던 '칠천량해전지'를 처음 접한 것, 그리고 고 여사를 만나 그의 화려한 가정사를 들은 것 정도이다.

처음 만났었지만 대화를 흉허물없이 토해주신 고 여사님께 감사한다.

 

 * 칠천량해전 : 1597년(선조 30)에 발생한 정유재란중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패한 해전.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1월에 조선을 재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 이에 도원수(都元帥)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으로 벌한 뒤 급히 한산도 본영으로 돌려보냈다. 본영에 돌아온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하기 위해 3도수군의 전선 160여 척을 다 출동시켰다. 그런데 부산진포구의 일본 수군은 미리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란작전을 유도했다. 게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여기에서도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의 영등포로 후퇴했다. 조선군은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15일 밤에 도도·와키자키·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수륙양면기습작전에 말려들었다. 원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접전했으며, 경상우병사 배설은 전세를 보고 있다가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갔다. 원균은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여 결국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도망쳤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죽은 조선 수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해전으로 3도수군통제사인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전사했다. 이로써 조선의 3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함대는 서쪽 해상을 향해 쳐들어가 일본군의 남원 및 진주로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이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흩어진 병력과 배를 수집·점검할 것을 명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3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충청수사로 권준(權俊)을 기용했으며 뒤이어 전라우수사에 김억추(金億秋)를 임명했다. -브리태니커-

 

거제도와 칠천도의 연육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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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과 남망산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