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서)
유회당 종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 님들
바이바이~~
구완동 어청골에서 중도 탈출하시는 분들...
(우리의 신조 : 못먹어도 고!!!~~)
오도산 정상에서 신라의 달밤님과
(귀가 도중 신라의 달밤님이 우리끼리(?) 뒷풀이로 굴국밥을 사주셔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도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이사동 전경
비파산성
광영지 위의 소화동천(小華洞天)
영귀대(詠皈坮)암각
영귀대 설명을 꼭 다시 해달라시는 분이 있어서 예전 산행기에 썼던 내용인데 재방송합니다.
영귀의 출처는 논어 선진편입니다. 이 문장은 논어에서 가장 긴 문장입니다.
공자께서 자로,증석,염유,공서화에게 질문을 합니다.
만약 너희들의 학덕을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자로, 염유, 공서화는 모두 벼슬을 해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은 “莫春者(막춘자)에 春服(춘복)이 旣成(기성)이어든 冠者五六人(관자오륙인)과 童子六七人(동자육칠인)으로 浴乎沂(욕호기)하고 風乎舞雩(풍호무우)하며 詠而歸(영이귀)하리이다."라고 무릎이 저절로 쳐지는 명답을 합니다.
(늦은 봄철에 봄옷이 만들어 지거든 어른 대여섯명과 아이들 육칠명과 더불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 올라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다가 돌아오겠습니다.)
증석은 정사보다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남들처럼 세속적인 욕망에 시달리지도 않고 무리가 없으면서 소박한 인간생활 속에서 조촐한 풍류를 즐기겠다고 한 자상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봉강정사를 세운 난곡 송병화도 증석 처럼 벼슬욕망을 버리고, 자연에서 소요자적하며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하고자 영귀대라고 지은 것입니다.
봉강정사(鳳崗精舍) 현판 글씨는 봉강정사(鳳岡精舍)
기계인 일창 유치웅이 90세의 나이인 1990년도에 쓴 글입니다.
일창은 성균관 부원장 등을 역임하고,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개인전은 한번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가가 90세의 나이에 쓴 글답게 글씨가 물흐르는 듯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합니다.
문헌에는 鳳崗精舍로 나오나 편액은 鳳岡精舍로 썻습니다.
崗과 岡은 서로 통하는 글자입니다.
의두헌(依斗軒)
덕천
현재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의 병산사에 배향되었습니다.
은진 송씨 집안과 교류가 많았습니다.
영귀대(詠歸臺) 담당
담당은 은진인으로 충북 영동군 상촌면 출신입니다.
(계담 송국사의 후손. 송국사는 고창현감을 지냈으며 우암
어려서부터 서예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평생을 서예공부에 몰두하여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오체에 모두 능했다고 합니다.
알 수 있습니다.(송우용의 선조인 송국사 묘가 이사동에 있음)
영귀대를 고종 건양 1년인 1896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니, 만약 그 때 현판을 썼다면 담당이 34세때 쓴 글입니다.
참고로 봉소루는 신유년인 1921년에 봉소루십경등 여러 편의 현판을 달았는데,
봉소루,윤집궐중 현판을 그 때 썼다면 송우용이 59세때 쓴 글씨가 됩니다.
봉소루 현판의 글씨가 영귀대 현판의 글씨 보다 낫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송우용이 봉소루 현판을 더 늦은 나이에 쓴 것에 합당하기도 합니다.
한천(寒泉)
산하출천(山下出泉) / 산 아래 샘이 솟네
감한이심(紺寒而深) / 검푸르게 차면서도 깊어
표음기락(瓢飮其樂) / 표주박으로 떠 마시는 이 기쁨을
수월전심(水月傳心) / 샘에 비친 달에게로 마음 전하네
사우당입니다.
송국택은 매(梅)련(蓮)송(松)국(菊)을 사우(四友)로 정했다는데,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사우는 무엇인지요? (혹시 술,담배,도박,여자? *^^*)
사우당 대문
타샤님이 찍어서 게시해달라고 하셔서 이렇게 합니다.
고균 김옥균 생가지 비석
신위도근원, 김옥균의 글씨입니다.
조선중후기 우리나라 인물을 알아보려면 안동김씨 족보를 봐야하고,
조선시대 우리고장 대전의 인물을 알아보려면 은진송씨 족보를 봐야합니다.
조선중기에 안동김씨 중 본향인 안동을 떠나 서울
(
병자호란시 주전파로
손자 중에 곡운 김수증은 옥류각, 제월당, 옥오재, 남간정사 현판을 썼습니다.
(제월당 송규렴의 외숙이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임[형제가 전부 정승을 지냄])
집안이 대대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습니다.
(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삼국산아 다시보자
후손 중에 정승,판서,참판,왕비가 줄줄이 나와 금관자가 서말 나온 집안이라는 칭호를 듣습니다.
이러한 장동김씨와 은진송씨는 수백년에 걸쳐 가문이 교류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쌍청당, 옥류각, 제월당, 옥오재 등이 은진송씨 가문의 건물인데 그 현판을 장동김씨들이 쓴 것입니다.
또한 서인계열 중 노론의 핵심이었던
또한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협, 김창흡이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당파가 갈리자 사대부 집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같은 당색끼리 혼인을 하게 됩니다.
노론의 두 핵심인 안동김씨와 은진송씨가 여러대에 걸친 사제, 혈연, 동지 관계로 혼인을 맺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양쪽 가문을 내력을 보면, 생부
(양쪽 집에서 모두 양자를 가서 보학상으로는 19촌으로 멀어지게 됩니다.)
충청남도 관광 안내지도를 보면
그래서 현재 대전 이사동과 공주 정안에서 각각 생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나라를 크게 바꿔 놓을 만한 혁신인물로 두 사람을 꼽는데 조선 중종 때 정암
그러나 두 분 모두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상단 좌측 옥류각, 우측 제월당
가운데 남간정사
하단 좌측 옥오재(이상 전부 곡운 김수증 글씨) 우측 쌍청당(선원 이상용 글씨)
은진송씨 취옹당 재실
사우당 송국택의 생부는 취옹
추원재는 은진송씨 승지공파 (송국보) 재실입니다.
사우당 송국택과 8촌지간입니다.
추원재
대들보, 중보, 종보, 도리, 서까래가 보이는 모습이 자못 아름답습니다.
월송재
은진송씨 삼가공 종중 재실입니다.
송희건이 건립한 건물로 송희건의 당호가 월송재입니다.
송희건은 안동공파로 방금 위에서 본 추원재 송국보의 아버지입니다.
취옹당 송희명과는 사촌이 됩니다.
(송희건은 사우당 송국택과는 원래 오촌이나 송국택이 양자를 가게되어 보학상으로는 촌수가
멀어집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처 학현재
자산공파 재실로 군수를 지낸 송세협으로 부터 갈라집니다.
오늘 봉강정사, 동로사, 오적당, 영귀대, 의두헌, 사우당, 학현재, 거업재, 산신각, 여경암, 유회당 등의 건물을 둘러 보았는데 각 전각 명칭의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당(堂)은 부속공간의 중심건물을 부르는 말입니다.
헌(軒)은 원래 비바람막이가 달린 수레를 의미하는 말인데, 살림집 성격의 당의 형식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글자에 수레거변이 붙습니다.
정사(精舍)는 살림집 본채와 떨어져 경치 좋은 곳에서 별서 개념으로 지은 작은 규모의 살림채를 이릅니다.
재(齋)는 당과 비슷하지만 제사를 드리거나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소박하게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정사와 개념이 비슷하며 두 개념을 결합하여 재사(齋舍)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사(祠)는 성현이나 충신 등의 위패나 영정을 모셔놓고 제사하는 건물입니다.
대(臺)는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높은 대 위에 지은 건물을 말합니다.
암(庵)은 주전과 떨어져 한적한 곳에 별도로 작게 지은 건물입니다. 대개 사찰 건축에서 스님들이 기도 정진하기 위해 산속에 암자를 만듭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끝"
2010. 2. 21.
- 가을 하늘 -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 사진전 (0) | 2015.02.24 |
---|---|
중국의 명산 칠채산(七彩山) (0) | 2014.10.04 |
[스크랩] 시진핑 시대와 한국의 미래 (0) | 2013.11.29 |
술자리 10불출(十不出)-베껴옴 (0) | 2010.08.25 |
[스크랩] 반전의 반전 ‘보석비빔밥’, 가족의 소중함 그리며 종영 (0) | 2010.02.22 |